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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ug 13. 2023

여름날

빗물에 말아먹은 산딸기처럼

  언니는 동작이 빠르다. 오늘 같은 공휴일에 언니를 놓친다면 온종일 동화책을 읽으며 배로 방바닥 청소나 하게 될게 뻔하다. 아침부터 부산한 언니의 발소리. 나를 떼어놓으려고 현관보다는 장독대 옆 쪽문을 사용할 거라 예상한다. 일찌감치 담벼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언니가 나오길 기다린다. 드디어 슬며시 문이 열리고 언니가 고개를 내민다. 언니! 하고 부르니 깜짝 놀라며 물러선다. “너는 니 친구하고 놀아. 왜 나만 따라다녀!” 화가 잔뜩 난 언니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마음에 울린다. 

  그동안 내가 너무 했나?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몰려와 전의가 사라지고 다리에 맥이 풀린다. 아무래도 오늘은 언니의 작전에서 빠져 주어야겠다. 사실, 따라다니기는 집안 내력이다. 오빠는 큰언니를 따라다녔고 작은 언니는 둘째 언니를, 그리고 나는 작은 언니를 따라다닌다. 그런데 오늘 내가 쉽게 마음을 접은 건 유난히 호소력 짙은 언니의 목소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얼마 전 있었던 일이 많이 거들었다.  

  그날도 언니는 친구들과 무슨 계획이 있었나 보다. 눈치를 챈 내가 "나도 갈래." 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언니의 날씬한 다리가 후다닥 큰길 쪽으로 달려 나갔다. 짧은 다리로 안간힘을 쓰며 달렸지만, 언니는 자꾸만 멀어지고 마음만 급한 나는 그만 '쿵' 하고 길가에 넘어지고 말았다. 통증이 느껴지기도 전 무릎에 난 빨간 피를 보고 놀라 ‘으앙!’ 하고 울음이 터졌다. 저만치 달리던 언니가 돌아와 내 머리를 한 번 쥐어박더니 일으켜 세워 옷을 털어주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며칠 후 언니는 빨간 벨벳 천으로 만든 앙증맞은 중절모자 모양의 머리핀을 나에게 불쑥 내밀었다. 언니의 선물을 받아든 나는 내심 놀라고 고마웠다. 무릎을 다친 일이 언니의 마음에 걸렸었나 보다. 

  찬 방바닥에 누워 더위를 식히는 무료한 오후. 문득 언니와 가재를 잡던 흥겨웠던 날을 떠올린다. 따라갈걸 그랬어. 혼자 중얼거린다. 그 순간 방문이 열리더니 아버지의 반가운 음성이 들린다. "막내야, 고기 잡으러 갈까?" 냉큼 일어나 아버지를 따라나선다. 물고기 담을 양동이를 들고 한 손은 아버지의 큼지막한 손을 꼭 잡는다.   

  아버지의 걸음걸이는, 엄마의 표현에 따르자면, “붕붕 날아다니신다.” 아버지에게 종종걸음이란 있을 수 없는 일. 도포 자락을 바람결에 살짝 얹어준 양반의 걸음걸이다. 내가 두어 걸음 걸은 후에 한번은 뛰듯이 따라잡아 주어야 발걸음을 맞출 수 있다. 나는 자꾸 아버지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그러면 아버지는 "이거 놓으세요." 하며 장난을 치신다. 아버지와 걷는 일은 즐겁다.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히기 시작하는데 강까지는 아직 멀었다. 문득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무더운 여름날 언니들과 강에 수영하러 나서면 대문 옆 그늘에 앉아 부채질하시던 할아버지. “날이 더운데 가지 말지.” 하셨다.

  노랑과 검정의 미끄러운 옷을 입은 쏘가리와 배에 무지개 빛깔이 감도는 작은 고기 몇 마리가 겨우 양동이 밑바닥을 가릴 무렵이다. 갑자기 가려지는 햇살에 고개를 들어보니 저만치서 검은 구름이 달려오고 있다. 곧 하늘 저 끝에서, 너! 뭐 잘못한 거 있지? 하고 천둥이 매섭게 고함을 친다. 어느새 먹구름은 머리 위를 지나고 연이어 소나기가 퍼붓듯 쏟아져 내린다.

  물놀이하던 사람들이 가까운 집 쪽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아버지와 나도 그들을 따라 방향을 정했다. 한참을 부지런히 달리는데 아버지가 보이질 않는다.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는 아직 저만치 뒤에서 성큼성큼 점잖게 걸으신다. 이 장대비 속에서도 뛰지 않으신다. 빨리빨리! 나는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부르며 손짓을 한다. 아버지의 얼굴 위로 빗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데 무엇이 그리 즐거우신지 함박웃음이 화안하다. 아마도 아버지는 막내와 놀러 나온 이 하루를, 이 황당한 소나기까지도 마음껏 즐기고 계신가 보다. 

  작은 집의 처마 밑, 낯선 사람들이 가까이 서서 비를 긋는다. 갑작스러운 비의 공습에 넋이 나갔는지, 어색해서 인지 서로 말이 없다. 한기가 온몸에 느껴진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만 그칠 때도 된 것 같은데 여전히 거침없는 비의 기세에 기가 죽는다. 소리치며 내리는 비로 가까운 경치도 보이질 않는데 저만치 우연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다. 두 아이가 이쪽으로 달려온다. 한 아이의 손엔 큼지막한 주전자가 매달렸다. 아이가 한 발씩 내딛을 때마다 뚜껑이 벌렁벌렁 입을 버리고 빨간 물을 주룩주룩 뱉는다. 갑자기 가슴이 선득하다. 빗물로 목욕한 한 두 아이가 처마 밑으로 불쑥 들어서는데 아버지가, 숙희야! 하신다. 그 중 한 아이는 아침에 나를 두고 간, 작은 언니가 아닌가! 

   어디 갔다 왔어? 뾰로통한 입으로 물었다. 둥글봉. 언니의 기다란 손가락이 강 건너를 가리킨다. 입이 떡 벌어진다. 언니는 내 생각보다 늘 멀리 진출한다. 게다가 작전명이 새롭다. 그것이 내가 언니를 따라 다니려고 기를 쓰는 이유인 것을. 언니의 오늘 비밀 작전은 강 건넛마을에 산딸기 따러 가는 일이었다. 

  주전자 뚜껑을 열어본다. 목까지 가득 찬 빨간 산딸기가 빗물에 흥건히 젖어있다. 흥! 하고 돌아서려는데 딸기 맛이 궁금하다. 상큼한 산딸기를 서로 질세라 연신 입속으로 굴려 넣는다. 배를 채우고 나니 삐친 입이 어느새 쏙 들어갔다. 딸기 물로 얼룩진 손과 입언저리. 각설이 타령이 딱 어울리는 서로의 몰골을 바라보며 히죽댄다. 빗물에 말아먹은 산딸기처럼 싱거웠던 하루, 그러나 세월이 가도 새록새록 선명한 그 여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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