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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ug 13. 2023

오리곤 101

매이는 기쁨

  모래 언덕에 올랐다. 나를 맞는 것은 삼색도화지다. 서쪽으로 펼쳐진 흰 모래사막이 한 뼘, 사막이 끝나는 곳엔 또 한 뼘의 남색 바다가 일렁인다. 그리고 맨 위는 조각구름 한 점도 없는 하늘. 끝이 없는 파랑이다.

  첫 번째 흰 칸으로 아이들이 달려 나간다. 남색 칸을 넘어 파란 칸으로 달려오를 기세다. 멀리 오아시스처럼 보이는 한 무리의 나무숲을 향한다. 까르륵 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아득히 들려온다. 나는 어서 돌아오라고 손짓도 하지 않고 그들이 즐기는 이 해방에 박수를 보낸다. 멀리 달려라. 깊이 들여 마셔라. 이 사막의 뜨거운 열기를. 오래오래 기억하라. 차선도, 신호등도, 소음도 없는 흰 모래 위의 자유를. 저 멀리 두 아이가 작은 공처럼 구른다.  

  내가 아이였을 때, 내게 가장 자유로웠던 순간은 한 장의 도화지 안에서였다. 종이 한 장의 범위 안에서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좋았다.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빨강 꽃잎의 해바라기도 그렸다. 콧날이 너무 날카로워서 종잇장도 벨 것 같은 여인의 얼굴을 그려보며 흥겨웠다. 어두운 골방 안에서 종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오늘, 아이들도 이 도화지 속에서 나처럼 자유롭기를. 그러다 문득 나로부터 자유로워질 미래의 아이들을 상상한다.

  한 쌍의 젊은 남녀가 모래 언덕으로 올라온다. 가벼운 눈웃음으로 내 옆을 비껴 지나는데, 강아지 한 마리가 쫄랑쫄랑 그들의 뒤를 따른다. 펼쳐진 모래 언덕을 보자 강아지는 발에 발전기라도 매단 듯 내달리기 시작한다. 주인들은 바다를 향해 찬찬히 발걸음을 내딛고 강아지는 주인과 떨어져 쭉쭉 뻗으며 멀리 달려 나간다. 저러다 둘째 칸으로 사라지겠다 싶은 무아지경의 순간이다. 그러나 너무 멀어졌다 싶으면 다음 순간, 방향을 바꾸어 큰 타원을 그리며 주인에게 돌아간다. 

  이 움직이는 도화지 위에 두 사람의 발자국은 사선을 그으며 나가고 강아지는 사선의 좌우에 커다란 원들을 계속 그려 넣는다. 목줄을 풀어주었으나 녀석은 주인에게 매이는 자유를 기꺼이 선택했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아래서 꼭 잡은 두 손으로 그들 또한 서로에게 속할 자유를 선택했음을 하늘과 바다와 사막에 선포한다. 대자연은 그들의 성혼선언을 들은 하객처럼 미소 그윽한 바람을 보낸다. 

  이다지도 자유로운 모래언덕에서 자연의 친절한 묘사로 보여주는 것은 결국 서로에게 매이는 기쁨이라니. 그러므로 먼 훗날 아이들이 내 품에서 멀어질지라도, 그리움으로라도 매여 있음을 충분히 감사할 것이라고. 

  나를 닮은 아이들이 두 개의 점이 되어 모래언덕을 넘어 미래로 멀어진다. 사선과 동그라미도 흰 모래언덕을 넘어 꿈의 바다로 풍덩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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