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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ug 15. 2023

교차점에서

여행의 꽃은 우연

   카메라를 멘 동양 여자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도울 일이 있을 것 같아 말을 건넸다. 그녀는 명절 연휴 동안 시애틀로 홀로 여행 온 한국인이라고 했다. 필요한 정보를 전해주고 좋은 시간 보내라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의 목소리엔 호기심과 들뜬 마음이 오롯이 담겨있었다. 교차로 신호등 앞에 서서 맞은편에 서 있는 낯선 젊은이들을 바라본다. 기억이 새순처럼 파릇파릇 돋아 오른다. 

   대학 이학년 사월이었다. 연휴를 맞아 고등학교 동창들과 강화도로 여행을 떠났다. 청바지에 운동화만으로도 충분히 화려했던 젊음이었다. 강화 북문 언덕에 올랐다. 각자 다른 곳에서 모인 관광객들이 봄꽃 향기 그윽한 동산에서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북문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산책로엔 가지마다 연두색 잎들이 환영하듯 손을 내밀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 나온 가벼운 옷차림의 젊은 부부가 앞서가고 있었다. 인상 좋은 그들에게 숙소로 안전한 곳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남편분이 공무원이라 여행에 필요한 좋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가족의 소개로 가까운 고려 궁지를 함께 둘러보고 보고 있었다. 아내 분이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조용히 말을 건넸다. 저기, 전화번호 좀 주실래요? 우리 오빠,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들은 부부가 아니었다. 큰 조카들 데리고 여동생과 오빠가 산책 나온 거란다. 당황한 나는 그녀의 청을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나와 걷다가, 골목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그들에게 잠시 배드민턴을 빌려서 치고 있었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한 젊은 남자가 저만치서 달려오더니 멈추어 섰다. 점점 내게로 다가왔다. 내 앞에 멈추어 선 그 남자가 말했다. 저, 00씨 동생이죠? 도서관에서 본 것 같네요. 낯선 곳,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온 언니의 이름에 어리둥절했다. 언니 친구가 경영학과에 남자친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바로 그분이었다. 

   제가 집이 강화예요. 연휴라 집에 왔거든요. 친구들과 여행을 왔다고 했더니 선배는 여행안내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친구들은 모두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전등사로 올라가는 길, 가위바위보에 일부러 진 것인지, 선배는 우리들 가방을 다 지고 올라갔다. 들뜬 마음에 몸까지 가뿐해진 우리는 깔깔거리며 즐거웠다. 게다가 저녁으로 맛있는 설렁탕까지 대접받았다. 친구들과 함께여서 좋았고 뜻밖의 도움의 손길도 만났다. 모든 의무에서 벗어난 시간, 어린아이로 돌아가기에 최적의 장소는 길 위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표를 사려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선배가 누군가와 반갑게 악수를 했다. 뒤를 돌아보니 그는 바로 어제 고려궁지에 우리를 안내했던 분이었다. 둘은 초등학교 동창이라며 오랜만에 만났다고 했다. 기막힌 우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다 같이 둘러앉아 다방 커피를 마셨다. 어제와 오늘 만난 낯선 이들과 낯선 곳에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해 사월의 강화도는 교차점이었다. 잠시 머물던 교차점을 지나 길은 각자의 방향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만난 그 우연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관한 전조였는지도 모른다. 한 친구는 졸업하기도 전에 결혼해서 제일 먼저 엄마가 되었다. 가장 앳돼보이던 친구는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었다. 친절을 베풀었던 선배는 언니 친구와 이별했다고 한다. 내 길은 가장 멀리 미국으로 이어졌다. 아무도 만남의 우연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처럼 모두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흩어졌다. 

   여행의 기억이 아직도 파릇한 것은 예상할 수 없는 일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리라.  어차피 일상 밖의 낯선 것을 겪는 것이 여행이라면 짜여진 일정 속으로 불쑥 들어서는 우연이야말로 여행다운 일이다. 촘촘한 계획 보다는 다른 사람의 길을 잠시 건네다 보거나 그 결이 다른 삶에 잠시 귀 기울여 보는 일도 좋겠다. 그리고 내가 걸어온 길을 몇 발자국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의미 없는 만남은 없으므로 그날의 기억은 나의 의식의 어딘가에 묻혀, 살아 갈 길을 조금 넓은 시야로 보게 하는 거름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초록 신호등이 켜지고 건너편에 서있던 젊은이들이 내게로 다가온다. 낯선 그들에게 미소를 던지니 그들도 싱그러운 미소를 건넨다. 그날, 강화에서 우리의 얼굴도 저렇게 빛났을까? 그들과 나는 횡단보도 위 줄무늬 교차점을 지나 서로 반대 방향으로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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