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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ug 15. 2023

개복수술

낡은 것들의 신음

   일주일 전이었다.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문을 열다가 깜짝 놀랐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무슨 일일까? 몇 해 전 물 데우는 히터가 고장이 나서 주차장 바닥에 물이 샌 적이 있었다. 얼른 히터가 들어있는 창고 문을 열었다. 히터는 웬 수선이냐는 듯 의젓하게 버티고 서서 제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창고의 오른쪽 벽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아래쪽 벽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벽을 조금 뜯어내어 보니 동 파이프들이 얼기설기 엮여있다. 

   좁은 파이프는 집 안으로 물을 공급하는 것이고 굵은 파이프로 집안에서 쓴 물이 밖으로 나가는가 보다. 집의 동맥과 정맥이다. 젖은 길을 따라가다 보니, 용의자는 작고 차가운 관으로 좁혀졌다. 파이프 하나의 아래쪽, 휘어진 부분에서 똑똑 물이 떨어졌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물이 만져지는 지점에서 멀찍이 떨어진, 위쪽과 오른쪽의 나무가 젖어있는 것이다. 물방울은 아래로만 떨어지는데 말이다. 셜록 홈스의 탐정소설에 몰입했던 어릴 적 추리 실력까지 동원했으나 이해 불가! 집안 전체에 물이 들어오는 길을 막아 놓고 일단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물길을 열어놓았으나 물방울은 점점 양이 적어지고 벽은 말라가고 있었다. 더 이상 응급 상황은 아니었다. 뭘까? 갑작스러운 개복에 놀라 집이 잔뜩 겁을 먹은 걸까? 이 집의 나이는 나와 동갑이다. 아파트 생활을 접고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가전제품들이 모두 비치되어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지난 십 년의 세월 동안 하나, 둘씩 고장을 일으켜서 바꾸어야만 했다. 입은 옷이야 낡으면 새로 사 입으면 된다 해도 몸통까지 고장이 났으니 어쩐단 말인가.

   사람,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잔잔히 읊조리던 지인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아내가 갑자기 똑바로 균형을 잡지 못한다고 했다. 변기에도 혼자 앉을 수가 없었다. 검사결과 뇌 속에 아주 작은 혈관 하나가 터졌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렇게 가는 실핏줄 하나이건만,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땐 온몸이 고통받는 것이다. 간신히 버텨왔던 연약한 혈관이 정신적 또는 육체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길 아닌 곳으로 선혈을 쏟아내면, 혈액이 뇌로 공급되지 못하고, 그로인해 뇌는 똑바로 앉으라고 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이웃 아저씨가 친구인 플러머를 소개해 주었다. 수염이 듬성듬성한 얼굴, 순박해 보이는 아저씨가 마운트버넌에서 내려오셨다. 집안 모든 물을 틀고 잠그는 명령을 몇 번 수행하느라 남편은 아래층 위층을 쿵쿵거리며 오르락내리락했다. 마침내 아저씨의 ‘아하!’하는 반가운 목소리에 조르르 달려가 보았다. 아저씨가 작은 동 파이프 하나를 들고 있는데 우리가 생각했던 휘어진 아랫부분이 아니라 봉의 윗부분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띄지도 않을 정도였다. 못 자국인 것 같다고 했다. 못에 눌렸던 곳이 세월이 지나면서 작은 구멍이 난 것 같다고 했다. 

   집안으로 물이 들어올 때 수압이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갑자기 수압이 세게 물이 밀려들어 올 때는 작은 구멍을 통해서도 엄청난 물이 샐 수 있다는 것이다. 조용히 스미듯 아래로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구멍에서 나온 물이 여러 방향으로 분수처럼 뿜어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잠 못 이루던 나의 궁금증을 모두 풀 수 있게 되었다.

   염려했던 대형 사고를 면하고 작은 동 파이프 하나를 갈아 끼우는 일로 개복 수술은 마무리되었다. 다른 파이프의 상태는 아주 양호하다고 별문제 없을 거라고 했다. 수리비를 받아든 아저씨는 양말부터 사서 신어야겠다며 껄껄 웃었다. 하얀 뒤꿈치가 검정 양말 밖으로 용감하게 불쑥 나와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저씨의 양말까지. 오늘 아침은 온통 낡은 것들이 문제였다. 

   요즘 몸이 세월에 적응하느라 힘겨운 모양이다. 밤에 이유 없이 식은땀이 흐른다. 평생 잠꾸러기로 살아왔건만 요즘 들어 새벽녘에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하는 증상이 생겼다. 몸에도 못 자국처럼 연약한 부분이 있다면 그 미세한 구멍을 통해 힘이 소모되고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하는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몸에 비하면 마음은 아직 철이 없다. 마음이 살고 있는 나이는 몸이 체험하는 나이와 사뭇 달라서, 가끔씩 쥐어박아 줘야 한다.

   세월이 등 뒤에서 소리치며 달려오면 몸은 허둥지둥 달리기를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몸은 계속 하강할 것이다. 다시 비상할 순 없는 법. 품위 있는 하강이길 바랄 뿐. 자꾸만 몸을 주저앉히는 게으름을 뿌리치고 동네 한 바퀴 걸어야겠다. 집을 나서다 친구의 등을 두드려 주듯, 벽을 다독여 준다. 

  “잘 버텨보자고, 동갑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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