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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ug 15. 2023

떡볶이가 추운 당신의 아들

   토요일마다 열리는 한글학교에서는 어머니들이 준비한 간식을 먹는다. 그날의 메뉴는 만인의 사랑, 떡볶이였다. 빨간 떡볶이를 한입 입에 문 아이가 말했다. 떡볶이가 추워요. 웃음이 먼저 터져 나왔다. 한국어가 두 번째 언어인 아이들은 같은 cold라도 몸은 춥고 물건은 차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같은 wear인데 모자는 쓰고 장갑은 끼고 양말은 신어야 한다는 것도. 복잡하니 하나로 통일하자는 말은 언어의 세계에선 통하지 않는다.

   언어란 생성부터가 미스테리여서, 때로는 이해불가다. 왜? 라는 질문에 명쾌한 설명을 들을 수 없어서 목표언어의 사용을 그저 귀와 입에 구겨 넣어 익혀야하는 점이 다른 언어를 배울 때 가장 큰 어려움이 아닐까? 결국 언어를 가장 쉽게 배우는 사람은 따지지 않고 호기심이 넘치는 두 살배기다.

   그렇다고 언어에 규칙이 없는 건 아니다. 모국어에도 많은 규칙이 있다. 또한 그 규칙을 벗어난 예외들이 있지만 그것을 눈치 채지도 못하고도 자유롭게 사용한다. 규칙을 배운 적이 없지만, 규칙에 잘 맞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국어를 사용하는 모든 이들의 행복이 아닌가! 이미 모국어의 틀을 가진 성인이 의지를 가지고 배우는 제2, 제3의 언어는 그 사람을 긴장시킨다. 이것이 내가 인천공항에 내리면 늘 마음이 포근해지는 이유일까?

   우리말에 어눌한 청년이 친구에게 영어로 쓴 편지를 한글로 옮겨주길 부탁했다.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의 편지인데 맨 아래, your son이라 적었다. ‘아들 드림’ 정도로 옮겼으면 좋았을 텐데 번역은 ‘당신의 아들’이었다. 직역으로 정확히 맞는 말이지만 ‘당신의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나왔다. 만약 그게 뭐 웃을 일이냐고 묻는다면 그 뉘앙스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래 전 가족끼리 대화를 나누다가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우스운 상황을 이야기하자, 딸이 불쑥, 웃기고 자빠졌어요. 하는 것이다. 어머! 딸! 그거 욕이야. 우습다는 뜻이 아니니까 그 말 사용하면 안 다!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근데… 이상하네. 웃겨서 자빠졌는데 그게 왜 욕이 됐지?  자주 까르르 넘어가며 웃는 딸은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익숙한 모국어 표현이라 한 번도 그렇게 물음표를 달아 본 적이 없었다. 다섯 살에 미국에 온 딸에게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생각해보니 웃긴다와 자빠졌다가 각각 빈정대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 둘이 모여 욕이 된 모양이다. 미국식 유머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나에게 딸은 너무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 들지 말라고  권했었다. 영어의 문화 코드가 부족한 엄마에겐 문자 그대로 직역하는 것이 가장 쉬운 접근 방법이라는 걸 딸은 이제 이해할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은발이 잘 어울리는 정형외과 의사가 말했다. 당신의 경우는 험프티 덤프티가 도랑에 빠진 경우는 아닙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얼굴만 뻔히 바라보았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 그 험프티님은 누구? 의사는 난감해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오! 당신은 여기서 자란 사람이 아니군요. 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험프티 덤프티는 동요와 만화영화 주인공인데 얼굴과 몸이 온통 계란이다. 만약 내가 이 문화 코드를 이해했다면 의사는 유머를 약간 섞어 간략히 환자의 상태를 설명해주는 적절한 문장을 만든 것이었다.

   인간의 머릿속엔 언어 사용이 가능하도록 부여받은 구조적 틀이 있다고 한다. 이 틀에 우리는 어휘를 부어 들어 본 적 없는 온갖 문장들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다. 언어에는 수학과 논리의 요소 그리고 문화와 철학이 담겨있다. 게다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숨기기도 하고 은유, 반어법, 패러디에 살짝 비꼬는 씁쓸한 유머나 빈정거리는 표현도 있다. 경제학자가 세 명이면 경제 전망이 네 가지라더니, 언어도 만만치 않다.  

   한 언어와 다른 언어가 만날 때 언어 안에 내재한 여러 요소들이 함께 만난다.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가 꼭 같은 다른 언어의 단어를 찾는 일은 골치 아프다. 구글 번역기가 같은 뜻의 단어를 찾아준다 해도 두 단어가 포함하는 범위가 조금씩 다르게 마련이다. 두 사람이 한국어로 번역한 프랑스 작가의 시를 읽은 적이 있다. 한 시의 두 번역이라기보다 차라리 두 편의 시였다.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과 함께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도 동등한 상을 받았다. 최초에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작가이지만 그만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 또한 창작 수준의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말이다. 번역가가 없다면 영어권의 수많은 독자들은 한강의 작품을 읽을 기회가 없다. AI가 물리칠 마지막 적(敵)은 시를 쓰고 그 시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 아닐까? 한강과 데보라 스미스가 나란히 선 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건 왜일까?

   이민자의 땅에서 언어와 벌이는 나의 씨름은 확실한 난제다. 언어. 상식, 문화와 뉘앙스의 간격을 나는 어떤 방식으로 메울 것인가? 떡볶이가 추운 당신의 아들과 당신은 어떻게 어우러져 살아갈 것인가? 당신의 아들은 또 다른 사람의 아들과 어떻게 어우러져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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