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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든 햇살 Aug 17. 2023

마감

   시간을 무한정 준다면 못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기간 내에 해내는 것이 실력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이다. 한 달에 책 한 권을 쓴다는 어느 작가의 말도 귀에 울렸다. 마감을 정해놓고 시작하라. 정하지 않으면 영영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삼학년 개학 전날이었다. 여름방학 숙제가 밀려서 밤을 새웠다. 그냥 학교에 갈 배짱도 없고 날이 새기 전에 다 해낼 수 있을까 걱정돼서 엉엉 울었다. 꿀밤을 먹이고 싶었을 텐데도 아버지는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함께 밤을 새워주셨다. 결국, 다음 날 아침까지 숙제를 다 마쳤다. 아침에 학교 가자고 친구가 왔다. 내가 밤새 눈물 훔치며 해놓은 숙제를 황급히 베끼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자라면서 미루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계속 짊어지고 다녔다. 시험 전날 밤새 눈 붙이지 못하고 머릿속에 암기할 내용을 구겨 넣었다. 아침이 밝으면 단어 하나라도 굴러떨어질까 머리를 고이 모시고 학교로 가서 그대로 펼쳐 시험을 보고는 집에 오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저녁에 일어나 다음날 시험을 위해 또 밤을 새웠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미루다 보면 급박한 시각의 집중력은 쓸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분량이 감당할만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돌아보면 그건 일종의 객기였다.  

   노학자가 공부의 노하우를 공개했다. 일찍 시작하라. 최종본을 제출하기 전 퇴고의 시간을 더 갖게 된다. 미리 구상하고 준비할수록 완성도가 높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일찍 출발점에 섰다 해도 길이 고속도로처럼 늘 곧게 뻗지는 않는다. 극심한 정체가 찾아온다면 미리 출발했다 해도 지각할 수 있다. 좁은 길을 구불구불 돌아 마침내 종착지에 겨우 다다르기도 한다. 정체가 오면 누군가는 산책이나 목욕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태우는 일로 타는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 개학 전날 밤처럼 울 수도 없고, 나는 무엇으로 정체 구간을 빠져나와 목적지에 닿을까? 

   어느 젊은 작가가 매일 한 편씩 글을 올리겠으니 돈을 지불하고 내 글의 독자가 되어주겠냐고 제안했다. 작가로서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것을 세상에 공포하고 싶었을까? 자신의 방문을 잠그고 죄수를 자처하는 작가도 있지만, 독자들과의 약속으로 자신을 묶다니. 독한 극약처방이다. 그 책임감에 짓눌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작가는 이 도전적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나서 매일 화상도가 높아진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마감은 땅이 끝나는 절벽. 그 지점을 넘어서면 글은 떠나야 한다. 더 이상 작가의 소유가 아니다. 작가는 절벽 끝에 남고 글은 작가의 품을 떠나 독자에게로 날아가 안긴다. 글은 작가가 낳았음에도 작가 자신보다 더 오래 사람들의 마음 안에 살게 될지도 모르는, 또 다른 오묘한 존재가 된다.

   신음이든 머리를 쥐어뜯기든, 전율하는 영감이나 뜻밖의 돌파구이든 마감 이전에만 겪을 수 있는 일들이다. 작가는 이 고된 노동을 자의로 선택한 사람이 아닌가. 때로는 배변의 욕구는 있으나 한 방울의 소변도 볼 수 없는 방광염의 상태처럼 고통스럽더라도, 스스로를 가두는 마감의 훈련을 시작한다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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