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으면, 없던 사람이 된다
스무 살. 메리는 그 나이에 회사에 들어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했다. 대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집이 없었다. 정말로, 없었다.
한때는 절간 바로 밑, 습기 찬 지하방에서 살았다.
창문도 잘 열리지 않았고, 여름이면 곰팡이가 벽을 타고 퍼졌다.
겨울엔 난방비가 없어 온몸을 덜덜 떨며 이불 속에서 버텼고,
비라도 오는 날엔 방 안으로 물이 들이쳐 걸레를 들고 바닥을 훔쳐야 했다.
하지만 메리는 그것마저도 감사하게 여겼다.
열아홉이 되기 직전, 아빠는 사고를 당했다.
병명도 치료비도 복잡했지만, 메리에겐 그냥 '아빠는 누워 있는 사람'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왜 우리 아빠한테 이런 일이.
병원을 전전하다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가정에 환자가 생기면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엄마가 그 몫을 맡았다. 덕분에 메리와 언니는 일상을 지킬 수 있었다.
메리는 아빠에게 매일 뽀뽀했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빠였지만 표정이 모든 걸 말해줬다.
어릴 땐 아빠의 까끌한 수염이 싫어 얼굴을 피해 다녔지만,
지금은 그 까끌함조차 그리웠다.
어른이 된 지금도, 메리는 매일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꼭 표현해야 후회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난했지만, 우리 가족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사는 건 힘들었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돈은 없었지만, 사랑은 넘쳤다.
그 기억 하나가 메리를 버티게 했다.
가족을 통해 돈이 전부는 아니라는 걸 배웠다.
하지만 살아가기 위해선, 결국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했다. 그리고 더 묵묵히 일했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땐 컴퓨터도 잘 다뤘고, 일머리도 있었다.
자격증도 땄고, 엑셀 함수도 남들보다 빨랐다.
기억력 좋고, 책임감도 강했다.
부장이 시키는 일은 무조건 그날 안에 처리했다.
주말에 연락이 와도 오히려 반가웠다.
"내가 필요하구나." 살아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일처리를 하여 칭찬받는 게 좋았고,
인정받는 게 살아 있는 증거 같았다.
그렇게 일하며 내 존재감에 나는 뿌듯했다.
묵묵히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알아줄 줄 알았다.
하지만 회사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회의에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겼고,
틀린 말을 해도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인정받았다.
묵묵히 일한 메리는 점점 배경이 됐다.
공은 부장이 챙기고,
메리는 이름도 없이 보고서 맨 아래에 조그맣게 적혔다.
아니, 빠진 적도 많았다.
하지만 곰처럼 일할 줄만 알았지, 내세울 줄은 몰랐다.
그냥 일하는 게 좋았고, 아직 막내라 이름 좀 빠지면 어때 하는 생각이 더 컸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반복되자, 부장은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네가 했어? 오, 난 몰랐네.”
몰랐다는 말 속엔 책임도, 배려도 없었다.
부장은 메리를 ‘신뢰한다’며 중요한 업무를 맡겼다.
하지만 그 신뢰는 방패가 아닌 방조였다.
성과는 부장이 가져갔고, 실수는 메리가 감당해야 했다.
그는 점점 더 편해졌다. 메리가 알아서 다 해주니까.
그 덕분에 그는 사람들과 관계를 쌓았고, 정치를 배웠고, 커리어를 만들었다.
그 모든 그림자 속에 메리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걸 보지 못했다.
다른 부서 직원들은 부장을 ‘좋은 상사’라 평가했다.
웃으며 인사하고, 친절하게 말하는 사람이라고.
메리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부장은 메리에게만 유독 날카로웠다.
작은 실수도 짚어냈고, 애매한 상황도 메리 탓이 됐다.
남자 직원들에게도 가끔 날을 세우긴 했지만,
그들에겐 회식비도 주고, 외근 기회도 챙겨줬다. 일종의 보상처럼.
메리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너는 월급 받잖아." 그게 전부였다.
마음이 서러웠다.
어떤 날은 일하다가 숨이 턱 막히기도 했다.
하지만 참고 또 참았다. 늘 그래왔으니까.
무엇보다도, 메리는 가난했다.
월급은 생존이었다.
부모님의 병원비, 전기세, 월세… 모든 게 메리의 어깨 위에 있었다.
그렇게 20년을 살아냈다.
야근은 습관이 되었고, 연차는 늘 눈치였다.
회식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늘 일했고, 묵묵히 책임졌고, 그럴수록 점점 투명해졌다.
회사 안에서 메리는 ‘티 내지 않고 일 잘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곧 ‘공기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메리가 설계한 시스템을 다른 사람이 발표했다.
회의실 안에서 그가 프로세스를 설명하는 동안,
메리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분명 자신이 기획하고, 정리하고, 수정하고, 밤새 붙잡았던 일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 설명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부장이 말했다.
“요즘 영호 잘하지 않냐? 똑똑하더라.”
그 순간, 메리는 웃었지만 손끝이 떨렸다.
내가 했던 노력, 내가 보낸 시간, 그 모든 것이 너무 허무했다.
나는 그저 묵묵히 일했을 뿐인데,
세상은 조용한 사람을 기억하지 않았다.
묵묵히 일하면 알아줄 거라는 믿음은 착각이었다.
참는다고 존중받지 않는다.
욕심이 없다고 고마워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으면, 없던 사람이 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겨우 배우는 중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선 나를 먼저 알아줘야 한다는 걸.
내 자리를 지키려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걸.
이제는 더 이상 나를 방치하지 않기로 했다.
사랑했던 아빠가 그랬듯,
나도 이제 나에게 자주 말해주려 한다.
"사랑해. 수고했어. 넌 잘하고 있어.”
가난했지만 사랑은 많았던 그 시절처럼.
이제는 나를 향해, 내 안에서부터 따뜻해지기로 했다.
다른 누구보다, 내가 먼저 나를 안아줘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