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뢰'라는 말 뒤에 숨은 착취

그들은 날 믿은 게 아니라, 그냥 쓰기 편했던 거야.

by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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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은 자주 말했다.
"나는 너를 신뢰해."


듣기엔 그럴싸했다. 믿고 맡긴다니,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메리에겐 그 말이 점점 무서워졌다.
‘신뢰’는 메리를 향한 격려가 아니라, 책임 회피의 암호처럼 느껴졌다.


보고는 없었고, 지시는 생략됐다.
대신 떨어지는 한마디.
“네가 알아서 해 줘.”


처음엔 진심이라 믿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문제 생기기 전 선제 대응했고, 이슈 생기면 조용히 해결했다.
정리하고, 조율하고, 마무리까지 다 메리가 했다.
그게 신뢰받는 사람의 태도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 ‘신뢰’는 곧 당연함이 됐다.

프로젝트 방향도, 일정도, 회식도 메리만 몰랐다.
기획은 타인에게 전달됐고, 실무는 메리에게 떨어졌다.
실패하면 “왜 그렇게 했어?”
성공하면 “우리 팀이 잘했지.”
결과는 공유되지만, 과정엔 초대되지 않았다.

심지어 회의 시간에도 메리는 곧잘 배제되곤 했다.
안건이 바뀌어도 알려주지 않았고, 사람들끼리 조율된 사안이 메리에게는 지시로만 전달됐다.
“그건 이미 얘기됐어.”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고, 메리는 벙쪄 있는 자신을 자책했다.


그러던 중 이상한 일이 생겼다.
팀에서 특별 인센티브가 나왔다는 소문이 들렸다.
부장이 윗선과 협의해서 예산을 확보한 거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메리는 몰랐다.
메리는 그 얘기를 남자 직원들의 퇴근길 대화를 통해 알게 됐다.
남자 직원 셋만 각자 30만 원씩 받은 사실. 이유는 따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건 회의에서 결정된 거였어.” 부장은 무심하게 말했다.
“내가 워낙 바빴잖아. 잊고 있었네.”


메리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바빠서 몰랐다는 그 말이 어딘가 익숙했다.
잊고 있었다는 말이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아니, 늘 들어온 말이었다.

그럼에도 메리는 참았다.
그 말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내가 중요한 사람이니까 믿고 맡기는 거야.’
하지만 그 믿음은 외로움이 됐고, 그 외로움은 곧 무력감이 됐다.


부장은 조직을 돌보는 리더가 아니었다.
위에는 부드럽고, 아래에는 냉정했다.
그의 신뢰는 메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편해지기 위한 것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단순한 보고서였지만 부장은 말했다.
“이번 건 네가 마무리해 줘. 난 윗선 회의가 있어.”
신입이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혹시 실수라도 날까 봐, 결국 메리 몫이 됐다.


밤 12시가 넘은 사무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메리는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적막뿐인 사무실 안, 메리는 혼자 앉아 문장을 다듬고 있었다.

눈은 침침했고 어깨는 결렸지만, 손은 계속 움직였다.
한 문장이라도 더 매끄럽게, 그래야 다음날 지적받지 않으니까.

그때 복도 너머 웃음소리가 들렸다.
부장과 동료들. 회식 후 돌아온 듯했다.

불은 켜져 있었고, 메리가 안에 있는 건 누구나 알았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수고 많다”는 말 한마디,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알고도 외면했다.

그 순간 메리는 깨달았다.
이 신뢰는, 책임지지 않기 위한 편리한 구실이었다.
자정 넘은 사무실 안, 혼자 앉은 메리는 그제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신뢰한다'는 말에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메리는 스스로를 잊고 있었다.
눈앞의 커피잔이 식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손목이 뻐근하다는 신호조차 무시한 채, 그저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버티고 있었다.


그날 밤, 메리는 처음으로 컴퓨터 전원을 끄고 창밖을 바라봤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창문을 손으로 짚으며, 메리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다음 날, 회의실.
부장이 어젯밤 보고서를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내가 정리한 거야. 밤새 다듬었지.”

그걸 듣는 순간, 메리는 물을 마시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믿고 맡긴다며. 근데 나는 언제 인정받을까?’


부장은 회식 자리에서 또 말했다.
“우리 팀엔 믿고 맡길 수 있는 애가 있어. 내가 안 해도 다 돼.”

옆자리 팀장은 감탄했다.
“그런 직원이 있다니 부럽네요.”


메리는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엔 서글픔이 섞여 있었다.
아무도 몰랐다. 그 말 뒤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그 말 뒤에 서 있는 삶의 무게를.

그날 밤, 메리는 결심했다.
‘이제 착각하지 않기로.’
신뢰라는 말에 더는 기대지 않기로.
믿음이라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했다.


사실 그동안 메리는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사는 것처럼 움직였다.
작은 칭찬 한 마디, 점심시간의 “수고했어”라는 인사 한 줄에 위로를 삼았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무시와 침묵 속에서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버거웠다.

그리고 어느 날 회의 중, 부장이 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메리의 작업을 언급했을 때—

그 순간, 메리는 더 이상 침묵하면 안 된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그건 제가 했습니다.”
“그건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말을 꺼내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고 손이 떨렸다.
하지만 마음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존중받고 싶었다.
단순하지만 선명한 감정.
그 작은 바람 하나가, 메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날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 선 메리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잿빛 구름 너머에 뭔가 조금은 맑아질 것 같은 느낌.
그건 아주 작고 희미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가능성이었다.

회사 앞을 지나치던 바람 한 줄기가 메리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 속엔 조금은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지쳐 있던 마음이 잠깐 쉬어가는 순간이었다.


메리는 핸드폰을 꺼내 자신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도 잘 견뎠어. 정말 수고했어.’


그 문장을 보며 피식 웃었다.
누군가의 인정을 기다리느라 너무 오래 외면했던 목소리였다.
이제는 누구의 말이 아닌, 자신의 감각으로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그 시작은 아주 작은 한마디였다.
“이건 제가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말이 당당한 이름이 되어 돌아올 거란 믿음.
그게 지금의 메리를 버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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