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지 않기

그 얘긴, 당사자에게 하세요

by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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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진짜 열 받아요.”
“부장이 또 나한테만 시켜요.”
“팀장님 말투 진짜 상처예요.”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메리를 찾았다. 신기하게도 다들 말할 땐 꼭 이랬다.
“메리밖에 없어.”
“메리는 공감해줄 줄 알았어.”
“메리한테만 말할 수 있는 얘기야.”


그래서 들어줬다. 부장 욕, 팀원 험담, 집안 스트레스, 애인 얘기까지.
어느 날은 생리통 약도 대신 사달라 했다.


처음엔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이 나를 믿는다고 느꼈다.
“역시 메리는 사람 됐어.”
“메리는 진짜 다 들어줘서 좋아.”
나는 착한 사람, 괜찮은 사람, 감정 정리기계가 되었다.


그런데 문득, 이상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내 이야기를 꺼내면 금세 상대가 말을 돌렸다.
“아 근데 진짜 나도 죽겠는 게 말이야…”


내 감정은 늘 밀려났다. 그리고 어느새, 내가 뭘 느끼는지도 헷갈렸다.
나는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자판기처럼 누르면 반응이 나갔다.
“헐, 진짜요?”
“와, 그건 너무했네요.”


그러던 어느 날. 터졌다. 일이 몰려 정신없는 날이었다.
내가 온몸으로 정리한 프로젝트를 보고 부장이 말했다.
“이건 메리가 정리했어요. 잘했죠.”


칭찬이었지만 이상했다. 내가 했는데, 왜 저렇게 말하지?
‘지시했으니 네가 알아서 했지’라는 식의 말투였다.
회의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 나를 보는 눈은 없었다.
나는 또 그냥 배경이었다.


그날 밤, 팀원이 다가왔다.
“선배, 나 이번엔 진짜 못 참겠어요. 부장이 또…”
들어주려다 문득 입을 열었다.
“근데 너도 요즘 실수 몇 번 있었잖아. 내가 몇 번 정리했는데…”


팀원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게 말할 줄 몰랐네요. 실망이에요.”


그날 밤, 도착한 카톡 한 줄.
[그냥 너도 다른 사람이랑 다를 게 없구나.]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도대체 뭘 잘못한 걸까.


다음 날 회의. 부장이 또 말했다.
“그 일정은 메리가 알아서 조율했죠.”


아니었다. 나는 전달받은 적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회의가 끝나고, 동료가 말했다.
“그거 네 일 아닌 거 알아. 나도 어이없었어.”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럼 왜 거기서 말 안 해줬어?”
“괜히 나까지 엮이기 싫어서… 너는 말 잘하잖아.”


그날 밤, 메리는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마주했다.
눈은 충혈됐고,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감정의 쓰레기통이었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욕하고, 누군가는 분노를 토했다.
나는 정리해주고, 수습해주고, 받아내야 했다.
내가 감정을 내보이면 “왜 그래, 메리답지 않게.”
조심스레 의견을 말하면 “실망이에요.”

나는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내보일 수 없었다.
그래서, 멈추기로 했다.


그 결심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사실 그날 이후에도 메리는 몇 번 더 듣고, 또다시 스스로를 탓했다.
“내가 너무 예민했나?”
“원래 사회생활은 이런 거지.”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견디려 애썼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기 목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걸 느꼈다.
내 마음인데, 왜 남들이 휘젓고 가는 걸까.
왜 나는 말 한 마디에도 죄인이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문득, 아주 작게 시작되었다.
그 단순하고 조용한 의문이 가슴에 내려앉았고, 그게 출발이었다.


그리고 작게 바꾸기 시작했다.
“그 얘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
“그건 네가 직접 말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당황했다.
“메리 왜 이래? 너답지 않게.”
그 반응이 무서웠지만, 이젠 괜찮았다.


어느 날, 부장이 또 떠넘기려 했다.
“그건 메리가 조율할 거예요.”


이번엔 가만있지 않았다.
“그건 제가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헛기침했다. 누군가는 눈을 피했다.
하지만 그 침묵, 나쁘지 않았다.


그날 저녁, 혼자 사무실에 남아 컵라면을 먹었다.
예전 같았으면 억울해서 울었겠지만, 이날은 속이 시원했다.
‘나도 이제 나를 지켜야 하니까.’


그리고 진짜 실행에 옮겼다.
회사 톡방에서, 뒷말 돌리는 동료가 또 말을 걸었다.
“메리야, 부장 어제 또 너한테 뭐라고 했지? 나 그 얘기 듣고 너무 화났어.”


메리는 처음으로,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그 얘긴 부장님께 직접 물어보세요.]

상대는 읽씹했다. 그리고 며칠간 말을 안 걸었다.
괜찮았다. 너무 괜찮았다.
상대가 멀어진 대신, 메리는 자기 마음 가까이에 갔다.


점점 익숙해졌다.
이젠 ‘내가 아니어도 되는 일’을 거절할 수 있게 됐다.


누가 감정을 토해내면, 이렇게 말한다.
“미안, 지금은 내 마음 챙기기도 벅차.”
“그 얘긴 네가 직접 정리해야 할 문제 같아. 내가 대신할 순 없어.”


사람들은 메리를 불편해했다.
예전엔 잘 들어주던 메리가 사라졌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메리는 말한다.
“이젠 나도 나를 좀 들어줘야 하거든요.”


그리고 오늘도 출근길, 조용히 다짐한다.
그 말은, 나한테 하지 마세요.
당사자에게 직접 하세요.
나는 이제, 감정의 쓰레기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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