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냈더니, 돌아온 건 조용한 퇴장
인사평가 시즌이었다.
회사 전체가 조용히 들뜨고, 동시에 긴장했다. 누가 올라가고, 누가 떨어질지. 누구는 웃고, 누구는 울지.
메리는 불안하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해왔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경력도 있었고, 실적도 분명했다.
팀에서 메리가 처리하지 않은 일은 없었고, 말없이 뒷정리를 도맡아 해온 세월이었다.
예전엔 승진 대상에도 올랐다. 실적도, 나이도 적당했고, 누구보다 일 잘했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순번이 밀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남자 직원들은 하나같이 어렸다. 아니, 정확히는 메리보다 10년은 늦게 들어온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경력도 실력도 부족했지만, 4년제 졸업장이 있었고, 무엇보다 남자였다.
부장은 그들을 유독 감싸 안았다.
실수를 해도 괜찮았다. 보고서를 틀려도, 회의에 늦어도 말했다.
“처음이라 그렇지 뭐.” “다음엔 잘하겠지.”
그들의 실수는 이해의 대상이었고, 메리의 질문은 꾸중의 대상이었다.
“그걸 왜 이제 물어봐요?”
일은 늘 메리가 했다.
뒤처리는 메리 몫이었고, 보고서의 완성은 그녀 손에서 끝났다.
하지만 공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인사고과 결과가 나왔다. C등급.
고개가 들리지 않았다. 설마 했던 일이 진짜 일어났다.
부장은 말했다.
“정원상 어쩔 수 없어. 기획실 방침이야.”
하지만 메리는 알았다.
같은 실수를 저질러도, 누구는 커버받고, 누구는 찍히는구나.
두 해 연속. 메리는 기획실의 유일한 C등급이었다.
C는 사실상 낙제였다.
눈 밖에 나면, 다음 해엔 구조조정 명단에 이름이 오를 수도 있었다.
같은 C를 받은 다른 부서 직원은 상사가 직접 뛰었다.
“우리 직원은 이 정도가 아니야.”
그리고 B로 바뀌었다.
하지만 메리는?
“나는 방침을 따를 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부장의 마음은 너무 투명했다.
싫으면 나가던가.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었다.
그날 오후, 메리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부장님, 혹시 제 평가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부장은 짧게 웃었다. “아, 그거? 회사 그만두면 마트에서 일하셔야지 뭐.”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무심했고, 눈빛은 가볍지 않았다.
마치 메리가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아야 한다는 듯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웃지 못했다.
그 말 한 마디가 메리의 모든 과거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메리는 여전히 집이 없었다.
월세를 내고, 아픈 가족을 돌보며,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회사를 나왔다.
월급이, 내 전부였다.
그런데 부장은 그 월급을, 한 사람의 생존을 이렇게 가볍게 말해버렸다.
그 순간, 무너졌다.
말을 하면 바뀔 줄 알았다.
그래서 용기를 냈고, 조심스럽게 표현도 해보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그게 불만이면 나가라”는 식이었다.
나는, 말을 했을 뿐인데. 그게 왜 죄처럼 돌아오는 걸까.
내가 여자라서? 내가 오래 다녀서? 내가 조용히 참고 있어서?
그날 저녁, 메리는 회사 건물 앞 벤치에 앉았다.
회사 단체방엔 축하 메시지가 쏟아졌다.
“승진 축하합니다!”
메리보다 한참 늦게 들어온 남자 직원들 이름이 반 이상이었다.
그들을 향한 칭찬, 그들의 이름이 오가는 그 화면을 보며 메리는 숨이 턱 막혔다.
그 직원들은 부장과 함께 갈 사람들이었다.
부장은 그들의 인생에 투자했다. 남자니까, 가정을 꾸려야 하니까.
딸 가진 아버지로서, 왜 그런 구닥다리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까.
부장 딸은 다르다고 믿는 건가. 아니면, 자기만 아니면 된다는 건가.
메리는 다시 침묵했다.
그렇다고 말하면 또 뭐가 바뀔까.
C를 준 것도 그들이고, C를 바꾸지 않은 것도 그들이고, 마트 운운하며 사람을 조롱한 것도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잘 보여야 다음 달도 월급이 나온다.
이직도 못 한다. 경단녀 취급받기 일쑤고, 나이는 더 무기처럼 돌아온다.
그러니, 참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 말아야 한다.
메리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일했다.
보고서를 정리하고, 숫자를 맞추고, 후배의 실수까지 덮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물었다.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하세요?”
메리는 그냥 웃었다.
정말 괜찮은 것처럼. 정말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하지만 밤이면 다시 무너졌다.
말을 했는데 왜 내가 더 상처받았을까.
말을 해서 바꾸고 싶었는데, 왜 더 밀려났을까.
말을 안 하면 사라지고, 말을 하면 찍힌다.
그런 회사에서, 오늘도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서 메리는 다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참기로 했다. 다시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다시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웃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라며, 메리는 글을 쓴다.
울고 싶을 땐 울지 않고, 쓰고 싶을 때 써버린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마음을 종이에 남긴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넌 잘하고 있어.”
“그 누구보다 잘 버티고 있어.”
그 말조차도 마음속으로만 반복하며.
메리는 오늘도 회사를 나선다. 다시, 조용히 출근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리에 앉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누군가는 메리에게 또 말을 걸겠지.
“이거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메리는 대답할 것이다.
“네.”
그리고 다시,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말하지 않는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그 하루는, 여전히 서럽고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