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 일, 왜 또 나야?

설명도 없이, 책임만 주는 사람들. 그 일은 왜 항상 내가 해야 하죠?

by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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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 왜 또 나야?

회의가 끝난 뒤, 부장이 메리를 불렀다.

딱히 설명도 없이 서류 한 뭉치를 건넸다.

"이거 다음 주까지 정리해줘요."


어느새 그 일이 메리의 일이 되어 있었다.

지시도 없었고, 협의도 없었는데, '메리가 할 줄 알았다'는 말 하나로 모든 것이 결정됐다.

왜 나지? 왜 항상 나지? 그 누구도 물어보지 않았다.

왜 이 일을 메리가 맡게 됐는지, 왜 혼자 이걸 감당하는지.


사실 메리도 물어보지 않았다.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건 오래된 습관처럼 몸에 박혀 있었다.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실망시킬까 봐, 거절하면 귀찮아질까 봐.

그러다 보니 메리는 점점 더 많은 일을 떠안게 됐다. 처음엔 작은 부탁이었고, 나중엔 기본 업무가 됐고, 결국엔 책임까지 메리 몫이었다.


말하면 변명 같고, 안 하면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메리가 빠진 늪이었다.

점심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일하고, 야근이 일상이 되고, 다른 사람의 업무까지 정리하다 보면 메리의 하루는 순식간에 저물었다.


부장은 어느 날 말했다.

"점심시간은 밥 먹는 시간만 써요. 1시간 꽉 채우지 말고, 20분 전에는 자리로 돌아오세요.

준비해야 하잖아요."

말투는 친절했지만 내용은 폭력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느긋하게 돌아와도 아무 말 없었지만, 메리는 그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말하면 또 '문제 있는 직원'이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메리는 밥을 먹고, 후다닥 양치하고, 허둥지둥 책상으로 돌아왔다.

같은 여자 직원들과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괜히 노닥거리지 말고 와요"라는 말이 메리의 귓가에 남았다.

그리고 메리는 그 요구를 매일 이행했다.

왜냐하면, 월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 살아야 했으니까.

일을 주면 좋았다. 내 영역이 확장된다고 느꼈다.

알아주던 말던, 누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 일이 '내 것'이 된다고 믿었다.

언젠가부터 메리는 그런 걸로 버텼다.

내가 해낸 일들이 쌓이면, 언젠가 돌아올 거라고.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더 많은 일을 또 해내야 했다.


그래도 메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일을 그만두면, 정말 마트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날, 메리는 조심스레 부장에게 말을 꺼냈다.

“혹시 이번 프로젝트 일정과 업무 분장을 다시 조율할 수 있을까요?”

부장은 살짝 웃었다.

말끝에 여유를 담아 이렇게 말했다.

“조율이요? 지금처럼 잘하고 있는데 왜요? 아니, 지금 이 일 놓으면… 솔직히 어디 가서 뭐 하겠어요?

마트라도 가야죠.”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말이 농담인 줄 알았지만, 그의 눈빛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메리의 처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걸 집어내고 흔들었다.

조용히,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 말은 메리에게 반 협박처럼 꽂혔다.


메리는 그날 밤 집에 돌아가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그 말이 떠올랐다. '마트라도 가야죠.'

그 말은 단순한 조롱이 아니었다. 현실적인 공포였다. 정말로, 다른 길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온몸을 잠식했다.

부장은 그걸 알았다.

알고서 그렇게 말했다. 메리는 깨달았다.

이 회사에서 나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감내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있다는 걸.


그날 이후, 메리는 더욱 묵묵해졌다.

일을 시키면, 그냥 했다. 시간을 뺏기면, 그냥 뺏겼다. 삶의 중심이 회사가 되고, 회사에서의 위치가 내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래, 이 일은 내 일이야. 나니까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 마음이 좀 편했다. 억울함도, 서러움도, '책임감'이라는 말로 눌러버렸다.

누군가 말했다.

"그 정도면 인정받고 있는 거 아니에요?"

메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정받고 싶었지만, 실제론 이용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작스럽게 부서에 감사가 떴다. 전날 오후에야 통보가 내려왔다.

감사 자료는 방대했고, 기한은 다음 날 오전 9시였다.

그런데 같은 날, 팀원 중 한 명의 퇴직 회식이 잡혀 있었다.

그날이 아니면 다시 회식을 잡기 어렵다는 이유로, 모두가 회식장으로 향했다.

단 한 사람, 메리만 빼고.

아무도 말했다.

“미안해, 메리.”

아무도 묻지 않았다.

“괜찮겠어?”

그저 당연한 듯, 메리는 사무실에 남았다.

정적이 깔린 사무실.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앉아, 끝도 없는 보고서와 증빙 자료를 하나하나 모아 정리했다.

중간에 컴퓨터가 몇 번 멈췄고, 프린터는 용지를 씹었다.


식은 커피 한 잔이 손끝에서 식고, 피로는 허벅지부터 목덜미까지 고여갔다.

문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회식장에서 찍힌 사진이 단톡방에 올라왔다. 케이크, 건배하는 잔, 모두의 웃는 얼굴.

메리는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그 손은 차가웠고, 어깨는 무거웠으며, 눈은 이미 충혈되어 있었다.

감사의 아침, 메리는 눈을 비비며 팀장에게 자료를 전달했다. 그는 말했다.

“와, 고생했어요. 메리밖에 없다니까.”


그리고 돌아섰다. 그뿐이었다.

그날 밤, 메리는 아무 말 없이 퇴근했다. 눈앞이 흐렸고, 걸음은 느렸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또 해낸 하루였다. 누가 알아주지 않았지만, 또 견딘 하루였다.

그리고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왜냐하면… 살아야 하니까. 그게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질문이 남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지키고 있는 걸까?' 나의 자존감인지, 나의 체면인지, 아니면 단지 나의 생존인지.

그 답을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이 헌신은 아직 단 한 번도 '인정'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그게 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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