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말 없는 사람들 – 침묵이 만드는 공포

말하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결국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by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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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

밤새 내린 비에 도로는 축축했고, 출근길 풍경도 눅눅했다.

메리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사무실 문을 열었다.


들어서는 순간, 뭔가 이상했다. 팀 단톡방에 부장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어제 자료 파일, 누가 마지막 검토했나요? 보고서 숫자 틀렸습니다. 이런 실수 반복되면 책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날카로운 칼날처럼 마음을 베어왔다.


그 자료는 메리가 아닌 주임 민수가 마지막에 손 본 거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건 제가 했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팀은 조용했다. 민수도 침묵했다.

그리고 그 순간, 메리에게로 모든 시선이 쏠렸다.


부장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그 메시지가 누구를 겨냥했는지.

그날, 메리는 ‘말하지 않는 공동체’의 냉기를 온몸으로 느꼈다.

회의 시간이 되어도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부장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발표를 시작했고, 슬쩍 메리 쪽을 보았다. 그 시선 하나면 충분했다. 이미 범인은 정해져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민수가 메리 옆을 지나며 작게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마지막에 체크 안 했어요."

사과라기보단 변명에 가까운 말. 누구도 듣지 못했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되돌릴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메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열면 감정이 터질까 봐 두려웠다.

점심시간, 조용히 혼자 나갔다. 김밥 한 줄을 입에 물고 거리를 걸었다. 돌아오는 길, 이런 생각이 스쳤다.

'왜 아무도 말하지 않았을까. 내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텐데. 그냥 모른 척하는 게, 편했나.'


이 회사는 그런 곳이었다. 말하지 않는 게 미덕이고, 책임은 조용한 사람에게 향하는 구조였다.

잘 참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기대고, 더 많이 얹힌다는 말이 떠올랐다. 메리는 그 무게 속에 묻혀 있었다.

오후가 되자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누군가의 실수, 부장의 눈빛, 동료들의 침묵—all of it. 전부 메리의 몫이 되어 있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아무도 대신 나서지 않았다. 메리는 말없이 일했다.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그러던 오후, 부장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윗선 보고는 민수 시켜. 너 말고."

메리는 당황했다. 그 보고 자료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기획 흐름도, 수치 분석도, 마지막 취합까지 메리의 손에서 완성된 일이었다.

"꼭 그래야 하나요? 제가 다 한 일인데..."

메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부장은 눈을 피하지도 않고 말했다.

"전무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 민수한테 시켜."


그 말을 듣는 순간, 메리는 알 수 없는 허탈감에 휩싸였다.

‘전무가? 아니, 그 사람도 결국 같은 인간이었구나.’

내가 열심히 해서, 깔끔하게 만들어낸 결과물. 그런데 그걸 민수 입을 통해 설명하라고?

메리는 입술을 질끈 다물었다.

반박은 없었다. 말할 수 없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그 순간, 메리는 깨달았다.

‘존재감으로 버텨왔는데… 이젠 그것조차 흔들리는구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자리에서의 성실함은 고통이었다.

메리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없는 사람 같았다.

‘이렇게 계속 있으면, 나는 그냥 사라지겠지.’

메리는 또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민수가 자신의 자료를 들고 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퇴근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웃고 있지도 않았고, 울고 있지도 않았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참고 있지? 이 사람들은 날 지켜주지도 않는데. 내가 무슨 충성이라도 맹세했나?’

결국 남은 건 단 하나의 이유.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그 밤, 메리는 메모장을 켰다.

일기 대신 조용히 마음을 적기 시작했다. 억울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배신감이 컸다. 하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

나는 오늘도 일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아무도 몰라줬지만.

그리고 마지막 줄. 왜 다들 말이 없어요?


다음 날 아침, 메리는 다시 전철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 틈에서 휴대폰을 쥐고 한 문장을 떠올렸다.

'나는 왜 이 안에 있어야 하지?'

답을 모른 채,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메리는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메일함을 비우고, 업무 파일을 정돈하고, 자신이 해온 일들을 하나씩 백업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작업이었지만, 메리는 알고 있었다. 이건 나를 위한 정리라는 걸.

혼잣말처럼 중얼였다.

"다들 말이 없으니까, 나라도 말해야지. 나라도 기억해야지."


하지만 오늘도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컴퓨터를 켰고, 또 하루를 시작했다.

모든 것이 평소처럼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메리만은 조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다음엔, 정말 다음엔— 내가 나를 지키겠다고.

그 조용한 정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메리는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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