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처음으로, 나를 위해 말을 꺼냈다

존재를 지우는 말들 속에서, 작은 외침을 시작하다

by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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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 안은 늘 같은 공기였다.
보고서, 차트, 분기별 실적.
그리고 부장의 지시.


메리는 어느 날 회의에서, 평소처럼 꼼꼼하게 분석한 내용을 조심스럽게 공유했다.
“이번에 거래처 대응 방식, 조금 바꿔보면 좋을 것 같아요.
CS 리포트 추이를 보면, 고객 이탈 지점이 뚜렷하거든요.”


말을 마치고 돌아오는 건 고요한 침묵뿐이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부장은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
“다른 얘기 없지?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말을 꺼낸 메리 자신조차 민망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건—
며칠 후 열린 전체 미팅에서였다.


부장이 똑같은 말을 꺼냈다.
“이번 분기에는 CS 이탈 지점 추이에 집중해야 해요.
우리 전략 방향 바꿉시다.”


그 순간, 메리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건 분명히 자신이 먼저 한 말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걸 기억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기억할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심지어 민수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습니다.”

메리는 회의실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아, 이건… 그냥 내가 없는 자리구나.'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입을 열었다.
“저… 그 얘기, 며칠 전에 제가 말씀드렸었는데요.”

순간 공기가 멈춘 듯 조용해졌다.
부장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랬나? 어쨌든 방향은 같은 거니까.”


회의는 계속됐다.
하지만 메리의 가슴에는 무거운 바윗덩이가 떨어져 있었다.


‘내가 아니어도 되는 사람이구나.’
‘내가 먼저 말하면 뭐해, 결국 가져가는 건 다른 사람이니까.’


그날 오후, 메리는 자신이 앉은 자리를 오래도록 쳐다봤다.
“이 자리… 없어도 되는 거 아니야?”


그 밤, 혼자 퇴근하는 길에 문득 생각났다.
주말 야근하던 날, 아무도 없던 사무실.
혼자 실적 정리하고 보고서 썼던 날.


그런데 월요일, 부장은 근무기록표에 메리의 야근시간을 싹 지웠다.
“그건 사전 보고 없었으니까 인정 못 해.”

그렇게 또 한 번, 메리의 시간은 지워졌다.

‘내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지우는 사람의 말을,
이제는 그대로 들어줄 수 없다.’


그리고, 메리는 작게 결심했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말하자.’


며칠 후, 또 회의였다.
이번엔 실적 요약 보고를 누가 할지를 두고 말이 오갔다.


부장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민수가 할 거니까 메리는 정리만 해.”


그 말에 메리는 조용히 말했다.
“제가 보고하겠습니다. 제가 분석한 자료예요.”


정적이 흘렀다.
부장은 눈썹을 찌푸렸다.
“전무님이 민수 시키라고 하셨어.”

순간 메리는 숨이 막혔다.
전무?
그 사람도 같은 사람이구나.

민수는 누구 라인일까.

부장은 민수가 말하면 자다가도 일어날 사람이었다.
윗선의 누군가가 민수를 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미 뭔가가 있는 건지.

민수는 실수해도 괜찮았다.
사람들이 민수를 보면 미소를 지었고, 말을 꺼내면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보는 건 더는 서럽기만 했다.

메리는 단지 자신이 투명인간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나만 잘하자.'

그날 보고는 결국 민수가 했다.
하지만 메리는 더는 멍하니 있지 않았다.


그날 이후, 점심시간을 다 쓰기로 했다.
그리고 제안서도, 메일도, 보고도 부장이 아닌 ‘모든 참조자’에게 같이 보냈다.

그리고 하나씩, 메리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또 어떤 날은 부장이 말했다.
“야, 점심시간 너무 길게 쓰는 거 아니야?”


메리는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규정대로 1시간 썼습니다.”
말끝이 또렷했다.


그 침묵이, 메리에겐 묘하게 유쾌했다.
누구를 해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있었다는 걸.
내가 일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작은 말.
짧은 문장.
그게 나를 지켜줬다.


메리는 그날 밤, 조용히 다짐했다.
“내가 먼저 말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스스로 믿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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