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 사고 싶어질 때 꺼내보는 기억
야간 산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20대 언젠가 인터넷 다음 카페 산악회의 신년 일출 설악산 산행을 따라갔거든요. 새벽 4시에 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엄청나게 추운 날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용의주도하다 생각해도 옆에서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20대답게, 등산화는 갖춰 신고 희고 얇은 여름 면바지를 입고 갔었습니다. 그때는 추워도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40대가 된 지금은 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 면바지 속으로 파고 들어온 1월 산바람이 에립니다.
산은 깜깜했습니다. 길은 산악회 운영진이 안내했고, 저는 앞사람 발만 따라가면 되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머리에 끼운 랜턴은 가끔 앞사람의 뒷모습을 비추고, 주로 내 발을 비추었지요. 발 디딜 땅을 확인하며 그저 한 걸음씩 움직였습니다.
별로 숨이 차진 않았는데, 일행에선 많이 뒤처졌습니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올 때쯤엔 선두와 많이 떨어져, 저와 몇몇은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선두 일행은 백담사로 내려간다고 했고, 저희가 쫓아가기엔 너무 멀었지요.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내내 놀랐습니다.
풍경이 너무 멋졌거든요. 또 길은 어찌나 위험하던지. 이런 길을 앞사람 발만 보면서 걸어왔단 말이야? 하는 의문과 놀라움이 일었습니다. 낮에 올라왔었다면 더 힘들었고 더 멀리 가지 못했겠다 싶었죠. 기억이 정확히 나진 않아요. 어디로 올라갔었는지, 아침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누가 있었는지, 흐릿합니다. 그저 이때 보인 풍경이 설악산 비선대 천불동 계곡이라는 누군가의 말, 그리고 내려오는 내내 풍경에, 추위에, 나의 무심했음에 감탄했고. 놀라운 경험으로 각인됐습니다.
이 야간산행을 종종 꺼내봅니다.
지금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면 된다, 이 한 걸음이 나를 꽤 멀리 데려다줄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요. 주변 사람들에 따라 내 자리가 너무 크게 달라질 수 있긴 하지만. 세상사 그렇죠 뭐. 좋은 인연은 내가 어찌해 보기 어렵지만, 오늘의 한걸음에 충실하기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평범한 일상이 하찮게 느껴지거나, 앞날이 너무 막막해서 복권이 사고 싶어지면, 그날의 야간산행을 떠올립니다. 그렇게 오늘 분량의 책을 읽고, 회사 일을 정리해 보고, 주변을 청소하고, 밥을 해 먹습니다. 1월의 차가운 바람으로 마음을 환기시키고, 그렇고 그런 보통의 하루를 이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