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쯤 시작되는 엄마표 북클럽 영어의 딜레마
12월 30일. 수학 학원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첫째 아이를 오래 보아온 선생님이고, 아이의 여유롭고 노력 수전노 기질을 너무 잘 아는 분이다. 용건인즉 아이가 공부에 개념이 너무 없다고,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고, 숲 속을 배회하는 각성 전 빨강 머리 앤의 상태와 같다고, 이제 그만 또래들이 모여서 공부하는 영어학원과 국어 학원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래들 있는 내신 학원에 꼭 보내세요. 요즘 애들 학교에서 공부 안 해요. 학원에서 합니다. 물론, 학교 수업만 갖고 스스로 챙겨서 하는 애들도 있지만, 00 이는 아니에요."
최근 확인한 중학교 1학년 평가 결과가 놀랍긴 했지만, 이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수학 선생님의 이야기는 더 놀라웠다. 요즘 공부는 학교와 집에서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학원에서 같이 하는 거라는 이야기. 수행 준비는 학원 선생님과 또래 아이들이 으쌰으쌰 하면서 하는 거란 이야기.
그래서 아이의 수행 점수가 수학 제외하곤 다 별로였던 걸까. 첫 시험 후 은근히 실업계나 예체능으로도 마음을 열어두었던 나에게 선생님이 쐐기를 박아주셨다.
"00 이가 실업계요? 여유작작 00 이가 가서 뭐 하겠어요? 예체능? 거기야말로 끈기가 필요해요. 00 이는 지금 공부가 제일 무난해요. 그냥 공부시키세요. 이번 방학에 국영수 기본을 닦고, 특목고는 안되고 일반고 갈 거니까 여름방학엔 과학 특강을 시작해야 합니다. 00 이는 지금 수학을 더 하는 것보다 다른 기초 과목들을 잡는 게 꼭 꼭 꼭 필요해 보여요."
뼈 때리는 말들이다.
너무 오래 꿈을 꿨나?
나도 각성 전 빨강 머리 앤 인가?
철없이 감상적이고 여유로웠던 건가?
설렁설렁 꾸준하게, 영어 학원을 알아보고는 있었다. 그동안 북클럽 위주의 영어를 하고 있었고, 방학 때 문법책 스스로 하는 정도였다. 영어 학습의 모토는 그러니까 '설렁설렁 꾸준하게'였다. 영어도 언어이기에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듣기, 읽기, 말하기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라 믿었고 지금도 믿고 있다. 또 어휘의 확장은 책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다만 학업 성취도 평가 항목으로서의 영어는 좀 달라 보인다. 거기엔 어떤 자세가 필요하다. 어느 정도 절박하고, 노력을 기울이며, 이루고자 하는 자세. 성실함 같은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성실함을 요구하되, 어쩐지 가심비 떨어지는 것 같은 내신 학원보다는 수능 영어를 대비하는 토플학원을 알아보고 있었다.
아뿔싸. 구멍은 수행평가에서 났다. 중학교 첫 시험은 오히려 괜찮았다. 그러나 학업 성취도는 시험 50%, 평소의 수행평가 50%로 이뤄진다. 수행평가에서 많은 아이들이 만점을 받는데, 이 아이는 수행평가에서 점수를 다 까먹었다. 10 문장을 1분 동안 발표하는 평가에선 45초에 끝내 버리고, 2 문장을 이어서 말해버려서 1 문장처럼 들리게 하는 등, 소설책 읽듯 설렁설렁 준비한 거다. 열심히 완성도 있게 해야 하는 것인데. 쯧.
그렇게 얻은 평가가 커트라인에 걸린 B. 전체 학생의 30~40%가 A를 받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의 영어는 하위 30% 정도로 생각해도 되려나. 휴. 그러나 이제 처음 시험을 봤을 뿐이고. 공부는 정말 자기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고등학교 가면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지 않던가. 주변에 학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하는 아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저. 그게 내 아이가 아니라는 게 현실.
어찌 됐든 아이는 영어학원을 시작했다.
그리고 엄청 고생하고 있다.
그래서 좀 안쓰럽다.
지금까지 두 번 등원했는데, 단어 시험 결과가 처참하다. 단톡방 알림에 아이가 64개 단어 중 1개를 맞았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아이는 다음날 오후 3시에 가서 재시험을 봤다. 3개를 맞았다. 저녁 9시에 다시 가서 재재시험을 봤다. 11개를 맞았다. 나아지고 있다고 격려와 칭찬을 많이 해주긴 했는데, 너무 여유 부리다 늦게 시작하게 해서 아이가 고생이 많구나 싶다. 혹시 독해나 듣기도 너무 어려운 건 아닐까 걱정되는데, 아이가 단어 시험 빼고는 그럭저럭 할만하다고 한다. 믿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이에게 말해줬다. 엄마도 걸어본 길이라고. 하루에 300개씩 단어 외워봤는데, 정말 학교 쉬는 시간에 단어 외우면서 눈물이 나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고. 그런데 되더라고. 외워지더라고. 그렇게 두세 달 만 해도 영어는 점프한다고. 지문을 보는 눈이 환해진다고. 해봤기 때문에 안다고. 힘내라고. 애쓴다고. 그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아이가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진 않았다. 입이 대빨 나와있었다.
첫째 영어학원으로 불거진 걱정의 불씨는 생뚱맞은 곳으로 튀었다. 둘째가 걱정되기 시작한 것. 둘째도 엄마표 영어 및 북클럽 위주의 '설렁설렁+ 꾸준히' 커왔다. 첫째를 보면서 지금부터라도 둘째를 학원에 보내야 덜 고생할까 싶어졌다. 여자아이라 또래들 사이에서 학업 성취도 차이가 심하면 더 예민하게 자포자기 반응하지 않을까 걱정부터 든다. 물론 이 중 어느 것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암튼. 북클럽만으로는 학업 성취라는 파도를 넘기에 한계가 있어 보인다. 북클럽과 학원을 동시에 보내는 것은 더 확실한 한계가 있다, 재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영어를 언어로서 '설렁설렁 + 꾸준히' 익힐 수 있는 시간은 언제까지일까? 아이가 책을 정말 많이 읽으면 중학교 학업 평가도 문제없을까? 첫째의 영어책 독서량이 최근 2년간 많이 줄긴 했었다...
평균의, 어쩌면 평균 이하의 아이를 둔 부모로서, 북클럽 영어의 한계를 느낀다.
앗. 이 근심을 끄적이며 풀고 있을 때 첫째의 영어학원에서 상담전화가 왔다. 내 마음 어찌 알고?! 선생님은 얘기해 주셨다. 아이가 단어 시험은 힘들어하지만, 대부분 단어 외우기 안 한 아이들이 적응에 시간 걸린다고. 독해나 듣기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라고. 그 학원에서도 매주 1회 영어책 읽기는 필수라고.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그래도 둘째 영어 학원은 슬슬 알아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