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팟캐녹음과 종교개혁급 후기의 기록
팟캐스트를 해보자고 했다.
책을 읽고 와서 떠드는 건 지난해부터 계속 해온 일이다. 고전소설 골라서 읽고, 쓰고, 만나서 떠들었다. 책 얘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 V클럽 불금온토 때부터 짐작은 했었지만, 정말 만날 때마다 눈물 쏙 빠지게 웃다 왔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나. 기억을 되돌리려 해 보면, 잘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진 빠진 기분은 아니고 뭔가 충전된 기분이었다. 존중받으면서도 툭툭 건드려진 기분. 표층부터 심층까지 제대로 털어낸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엄지들의 책 수다를 녹음한다 했을 때 별로 부담이 없었다. 오히려 즐거운 책 수다를 기억하기 좋겠다 싶었다. 남들에게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하는 사람이 신나면 됐지 뭐 싶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는 게 심심해지면 꺼내 들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첫 책은 지난번 식탁 차리기 했던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 요리할 장소를 제공해 줬던 서울 이수역 뒤편 그 교회에 녹음실이 있었다. 우연의 일치치고 너무 훌륭한 인연이다. 그렇게 첫 녹음을 했다.
6월 3일 토요일 오전 8시. 그날 자리에서 닉네임을 정하고. 무작정 녹음을 시작했다. 처음엔 순서를 기다려서 말하는 게 좀 긴장됐다. 그러다 금방 익숙해졌고 역시 즐거웠다. 다만 그날 정한 닉네임으로 부르는 것이 다들 헷갈렸고,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것, 마이크에서 떨어져 웃는 것 등 기본적인 규칙을 지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신났고, 마릴라의 코멘트 '입 좀 다물어라 Hold your tounge'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됐다. 녹음이 끝났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부분은 지금부터다.
대본없이 일단 시작했지만 크게 3 덩어리가 됐다. 고전을 왜 읽는지, <빨강머리 앤>의 로맨스 코드와 마릴라의 육아, 각자의 원픽 문장과 이유 잡담.
녹음파일의 리뷰를 받아봤다. 각자의 주변에는 참으로 날카로운 사람들이 많았다. 피드백은 가차 없었다. 책을 많이 본 이들에게는 깊이가 부족했고, 아이를 키우지 않는 이들에게는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으며, 책에 관심이 전혀 없는 이들에게는 정보가 부족했다. 서로 이야기를 하겠다며 주도권을 채가는 것 같거나, 문장을 끝까지 마무리짓지 않는 아마추어 풋내가 풀풀 났다. 웃음소리 때문에 소리가 먹히거나 녹음 상태 및 편집상 종종 단절되는 느낌도 들었다. 입가에 묻은 치약자국, 옷에 묻은 얼룩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뭔지 모를 부끄러움이 들었다.
혹시 너무 일찍 선악과를 따먹은 것 아닐까. 조금 더 에덴동산에서 즐길걸 그랬나.
녹음을 한 엄지들에게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같은 책을 봤고, 각자 한 두 꼭지씩 글을 써봤다. 모두의 글을 서로가 읽었다. 그래서 서로의 말이 잘 이해됐다. 청취자 입장과 좀 다르다. 또한 각자의 본업이 따로 있다. 책을 철학적으로 깊이 있게 파기에는 현생이 바쁘고 식견이 부족하며, 프로정신에 입각한 수다를 떨기에는 너무 평범하다. 깊이는 어쩔 수 없다 치고. 기술적 부분이나 간단한 정보전달, 녹음 규칙 지키기 등은 피드백을 반영해서 서로 조심하자 했다. 앞사람 이야기를 최대한 어루만지면서, 순서를 지켜 다시 수다를 떨어봤다. 노트북으로 녹음도 했다. 그런데 보통 때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피곤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살게 된 최초의 인류처럼, 노곤했다.
팟캐스트까지 어떻게 흘러갔더라. 되짚어봤다. 그 시작은 고전 읽기와 쓰기였고,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식탁 차리기도 해 보고 팟캐스트까지 왔다. 팟캐스트 하려 한다니까 추후 유튜브도 할 것인지, 그러려면 보완해야 할 점을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는 지인도 있었다고 한다. 유튜브?! 갑자기 판이 커지면서, 부산스러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래. 시작은 읽고 쓰는 것이었다. 오래된 글을 읽고 나의 글을 쓰는 것. 자기 안에 구덩이 파고 들어가는 그 느낌과 느낌들의 연결. 그리고 그게 즐겁다는 것. 이것이 중심이다. 하루 이틀 읽고 쓰고 말 것 아니다. 형태나 버전은 좀 달라져도 1년, 3년, 10년, 20년, 이어갈 거다. 읽고 쓰는 것이 나의, 우리의, 시작이자 끝, 알파이자 오메가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종교개혁에 버금가는 성찰의 순간.
근본으로 돌아가자. 텍스트에 집중하자.
이렇게 해보기로 했다. 읽고 쓰기를 주로 하되 특별한 즐거움을 주는 요리를 계속한다. 수다도 떨고 녹음도 이어간다. 단 기본 규칙 지켜주기. 녹음은 한 사람 한 사람 마이크 사용이 가능한 곳에서. 마이크 최소 5개로 각각 녹음. 교회 녹음실은 3개였다. <빨강머리 앤>을 또 다시 녹음하면 하는 나의 재미가 떨어질 테니 그대로 다음책으로 진행. 다음 <호밀밭의 파수꾼> 녹음 때에는 아래처럼 해보기로 했다.
*줄거리/ 작가/ 시대적 상황 간단히 말해주고 시작
*내가 뽑은 한 문장 준비해오기
*문장 전후 맥락 설명, 짧게
*그리고 평소처럼 막 수다
*자신이 쓴 글 부분 픽. 읽고 마무리
*주의사항 : 마이크에 대고 말하기/ 웃을 때는 마이크에서 떨어지기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읽고 쓰고 짓는다
에덴동산의 창세기와 비판의 종교개혁기를 거치고 나니 그제야 아주 긍정적이고 따뜻한 의견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후기는 꼭 늦게 도착한다. 비 내린 후의 무지개처럼 말이다. 엄지라는 이름을 두고 읽고 쓰기를 본격 해나가는 과정의 한 중간. 이 시공간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계속 가꿔나갈 생각인 건 확실하다. 친절하고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엄지 지인들의 공감 후기를 옮겨 적으면서, 엄지살롱의 비 새는 곳을 메꿔본다. 하자보수는 집중적으로 해야지. 때때로 그러나 오래 오래 머무를 소중한 공간이니까.
"재미있게도 고전 문학이라는 장르에 궁금증이 생겼어요^^ 그리고 장면장면 설명을 쉽게 전달해 주셔서 이해도 빨랐고 고전에 대한 어려움이 전혀 안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엄지님들의 생각에 공감을 강요하지 않고 주제의 전환도 자연스러웠어요. 저는 대학생 때 비를 맞고 걷는 게 좋았어요. 낭만적으로 생각되었거든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고 이 책으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놀랐고. 빨간 머리 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신선하고 다양한 관점들이 흥미로웠어요. 다섯 패널들의 합이 잘 맞는 것 같아요. 앤과 마릴라의 관계를 로맨스 공식으로 바꾸는 해석도 낭만을 쓸모없는 아름다움으로 정의한 것도, 모퉁이로 함축되는 결말도 마음에 와닿았어요. 어제오늘 짬짬이 듣다가 당장 읽어보고 싶어서 책 빌려왔답니다."
"음향 퀄리티 괜찮고, 분위기 좋았음. 책: 육아토크=2:8. 고전 소설 내용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 부분 더 많았으면 좋겠음. 일단 합격. 넘처나는 채널 중에 오래 살아남길."
"중간은 독서보다 육아 콘텐츠 같은데? 대상이 책 읽는 엄마들인가? 육아 얘기보다는 책 내용이 많이 나오는 뒷부분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다. 영어 원서 읽기 모임이니까 문장을 원서로 읽어주는 부분도 좋아. 그나저나 팟캐스트라니 @@@한테 엄청난 도전인데?"
"점점 주변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 함께 해보려는 사람들 찾기 더 어려운데. 이렇게 뭔가를 연대해서 나누고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좋아 보여. 쟝@@ 응원 응원 응원이닷."
2023년 6월 18일
두 번째 녹음을 사흘 앞두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