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홀든과 수녀 둘의 아침식사
혼자였다.
J.D 샐린저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홀든은 정말이지 외로워서 어쩔 줄 몰라한다. 그가 시도하는 대화들은 겉돈다.
고등학교를 나오기 전 스펜서 선생님과의 만남은 대화라기보다 훈계였다. 기숙사 친구들과는 장난이 쉽지 대화는 어려웠다. 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동급생의 엄마와도 불가능했고, 택시기사는 업무로 바빴다. 호텔 클럽에서 만난 시애틀 관광녀 3명의 마음은 혹시 마주칠지도 모를 연예인에 쏠려 있어서 질문할 수 조차 없었다. 매춘부 써니와 시도한 대화는 불발됐을 뿐 아니라, 포주 모리스가 등장하며 폭력적으로 일단락 됐다.
홀든이 드디어 대화에 성공하는 시점은 그 이튿날 아침 식사에서다. 전날 써니에게는 '별 볼 일 없는 쓰레기'라고 불렸고, 모리스에게 죽을 것 같은 한 방을 맞은 후의 아침이었다. 모처럼만에 식욕이 돋았다. 기차역 인근에 짐을 맡기고 샌드위치 바에 갔다. 홀든은 거기서 수녀 둘을 만난다.
6월 엄지살롱의 식탁은
이 기차역 인근 아무 샌드위치 바의 식탁이었다.
메뉴는 간단했다. 토스트, 커피, 계란 정도다. 6월의 평일 저녁 7시. 사당역 인근, 계란 프라이가 가능한, 인덕션이 있는 파티 공간이었다. 창 밖은 호밀밭의 파수꾼 책 표지처럼 불그스름했다. 부엌이 좁아서 나는 다 된 음식을 나르기만 했다. 수녀님들을 위한 메뉴로 토스트와 커피를 옮겼고, 홀든을 위해 토스트, 커피, 계란, 베이컨, 오렌지 주스와 담배를 두었다.
홀든의 식탁은 무겁고, 수녀들의 식탁은 가볍다. 홀든의 심미안은 여기서 마주친 수녀 둘의 가방이 싸구려라는 것을 알아챈다. 그들 간 차이에 그는 불편해진다.
달걀을 먹고 있는데 여행 가방이나 그런 걸 든 수녀 둘이 들어와 내 옆 카운터 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여행 가방을 도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아 손을 좀 빌려주었다. 아주 값이 싸 보이는 여행 가방이었다-진짜 가죽이나 그런 게 아닌 가방.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도 안다. 하지만 누가 싸구려 여행 가방을 갖고 있으면 그게 싫다.
p.166 <호밀밭의 파수꾼> J.D샐린저, 민음사 2023
여기서 문제, 훨씬 못한 여행 가방을 갖고 있는 애들하고는 룸메를 하기가 정말 어렵다 - 내게 정말 좋은 거고 상대방 게 그렇지 않으면. 녀석이, 그러니까 룸메가 똑똑하거나 그렇고 또 유머 감각도 멋지면 누구 여행 가방이 낫든 젠장 상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상관한다. 진짜 그런다.
p.168
그들 둘이 아침으로 먹고 있는 건 토스트와 커피뿐이었다. 그걸 보니 우울했다. 나는 베이컨과 달걀이나 그런 걸 먹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토스트와 커피만 먹고 있는 건 싫다.
p.169
차이에 대한 그의 성찰이 오묘하다.
홀든은 부잣집 자제다. 아빠가 변호사이고, 뉴욕 한 복판의 엘리베이터 보이가 따로 고용된 아파트에 산다. 할머니가 일 년에 4번쯤 생일 축하한다며 돈을 꽤 보내주신다.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를 나누는 기준은 실로 애매하다. 홀든은 가방처럼 지니고 다니는 소품에서 사람들 간 차이를 봤다.
그는 자신보다 못한 가방을 갖고 다니는 이와는 친구 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같잖은 우월감 때문이 아니다. 우월감을 가질 거라 상대방이 단정 짓는 상황이 더 불편했다. 또 가진 자가 무심코 한 행동이 덜 가진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 역시 불편 요소였다. 무엇보다 룸메이트 딕 슬레이그가 보여줬던 행동이 제일 싫었다. 홀든의 좋은 가방을 자신의 것인 양 전시하고 싶어 하던 가식. 홀든더러 부르주아라고 놀리면서 부르주아가 되고 싶었던, 어른들의 위선을 닮은 가식. 아마 그게 제일 불편했을 것이다.
비교의 기준점은 자기 자신이다. 내가 만약 연봉 100억쯤 된다면 연봉 5000만의 친구를 대할 때 조심하게 될 것 같다. 가령 주말에 랍스터가 먹고 싶어서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다녀왔단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여행 내내 비가 왔다 한들 친구에게 감히 하소연할 수 없을 것 같다. 반대 경우를 상상해도 마찬가지.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이와는 친구 하기가 어렵다는 그의 말이 와닿는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벌이와 씀씀이를 갖고 사는 세상은 또 싫다. 그건 너무 획일적이니까.
차이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부의 기준점도 척도도 분명 다를 것이다. 누구는 거주지의 가치로, 누구는 한 달 사용하는 생활비로, 어떤 이는 신고 다니는 신발을 보면서 상대방의 가진 정도를 가늠한다. 또 누군가는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기준으로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를 나눈다.
때로 그 차이는 견딜 수 없다. 열렬히 닮고 싶은 욕구 때문인지, 아예 달랐으면 하는 욕망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 간극을 벌리는 동시에 채워 넣으려 한다. 누군가는 거짓말로. 누군가는 가방, 시계, 자동차, 때로 고급 식당이나 여행 인증사진 같은 것으로. 그들 사이의, 우리 사이의 차이는 어찌 보면 억척스럽고 또 오히려 자연스럽다.
비교는 상대적이고 끝이 없다.
나는 확신한다. 아무리 치장해도 간극은 여전히 거기 있고, 또 처음부터 거기 없다는 것을. 스와치 시계를 찰 때는 롤렉스면 됐다 싶지만, 그걸 얻고 나면 필립파텍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필립파텍을 소유한다 한들 같은 브랜드 안의 상위 제품이 좋아 보이는 건 인지상정. 코치가방이면 만족할 것 같아도 루이비통이나 프라다 앞에서 기죽게 되고, 프라다는 샤넬이나 에르메스 앞에서 기 펴기 힘들다.
더 웃긴 것은 에코백을 매고 스와치를 차든, 에르메스를 매고 필립파텍을 차든, 그들도, 나도, 태어나 죽고, 먹고 싸며, 가족 때문에 울고 웃고, 일과 돈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인간관계가 버거울 때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어떤 것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다행히.
어쩌면 당연히.
수녀들은 그가 얼마나 부자인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녀들의 식사는 단출했다.
토스트와 커피.
수녀 둘 중 하나가 영어를 가르쳤다. 홀든이 과목 중에서 영어를 제일 좋아한다니까 올해 어떤 책을 봤냐며 관심을 보였다. 자연스럽게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하게 됐고, 홀든이 그 책이 좋긴 했지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수녀는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들었냐며 되물었다. 홀든은 그의 생각을 가감 없이 피력한다. 머큐시오가 잘못 없이 티볼트에 의해 죽는 장면이 마음에 안 든다고. 책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자유로웠고. '정말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모처럼만의 대화다운 대화는 책에 관한 이야기였다.
책 모임이 생각났다. 책을 읽고 내가 느낀 바를 충분히 얘기할 수 있는 책 모임. 나 역시 그런 책 모임을 좋아한다. 영화나 그림에 대한 얘기도 좋아한다. 시댁이나 주변 사람들 이야기만 오가는 자리에 가면 힘 빠지고 돌아오는 길이 공허한데, 책으로 떠들면 그 반대가 된다. 채워진다. 나만 이렇게 느끼진 않는 것 같다. 책 모임에 오는 사람들마다 하는 이야기이고, 반복적으로 듣는 고백이나 감상 중 하나다.
홀든은 그날 모처럼 대화다운 대화를 하고, 거짓말 도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책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대화의 기쁨을 느꼈다. 그 아침식사(breakfast)는 대화에 대한 굶주림, 단식(fast)을 깨는(break) 것이었다.
이 날 엄지살롱 식탁은 사실 처음에 좀 불편했다. 첫 팟캐스트 녹음 후 받은 후기를 공유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방송 프로와 아마추어의 간극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명품 팟캐스트를 위해 수다를 노력해서 하다보니 그게 참 불편했다. 그러다 우리 식탁은 역시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즐거움의 근본은 읽고 쓰기에서 온다는 것을 확인한 후 마음이 편안해졌다.
홀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네가 아무리 부잣집 자제라고 해봐야 아직 학생이다. 네가 뛰어난 직관과 양심으로 사회의 어느 계층으로도 속하기 싫은, 그 위선을 거부하고 싶은 '순수' 그거 인정한다. 그런데 세상 깨끗하고 순수한 곳 없다. 그리고 또 지저분하기만 한 곳도 없지.
에덴동산은 본래 돌아갈 수 없는 곳이야. 그곳은 케루빔이 지키면서 사람들의 귀환을 엄격하게 막잖아. 우리의 낙원은 새로 개척해야 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말이지.
‘너’와 ‘나’의 식탁에
때로 평화와 기쁨이 깃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