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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ㅑㅇ Feb 18. 2024

죽음을 모른다

소크라테스 변론 읽기 day 16,17,18


아킬레우스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에게 승리를 안겨준 용맹하고 뛰어난 장수로 전해집니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로 아킬레스 건을 제외하고는 전부 불사의 몸이었다죠.


그는 전쟁에 나가 헥토르를 죽이면 그 역시 죽게 될 것이란 신탁을 받습니다. 다만 그 죽음 이후 이름이 길이 남을 것이라는 첨언이 있었죠. 엄마 테티스는 당연히 전쟁에 나가려는 아들을 말렸지만, 아킬레우스는 '살아남아 웃음거리가 되고 대지의 짐이 되느니 (친구를 죽인 헥토르에) 복수하고 죽고 싶다 Let me die forthwith'고 했다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의 표상인 거죠.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싸움은 브래드피트와 피터오툴이 출연한 영화 <트로이>에 아주 멋있게 표현됐습니다. 브래드 피트(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이후 사자처럼 분노하며 헥토르를 외치며 부르는 모습이 생생합니다. 죽음을 예감한 헥토르가 전사자의 시체는 욕되게 하지 말자고 제안하자, 사자와 약속하는 것 아니라며 싸움을 시작하더군요. 아킬레우스 형아입니다.


영화 트로이 한 장면


소크라테스는 변론 중에 아킬레우스를 언급하면서, 자신도 배심원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을 것이며 계속해서 지혜에 대해 질문해 나갈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미움을 사는 일이라 하더라도, 신이 신탁을 통해 내려준 철학자의 길을 계속 걸을 것이라고요. 쓸모 있는 사람이라면 죽거나 살 가능성을 따지기보다 옳고 그름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면서 말이죠. 엄청 멋있습니다. 테스 형이라고 부르고 싶어 집니다.



God orders me
to fulfil the philosopher's mission
of searching into myself
and other men.



그에게 주어진 자리는 분명 어쩌다 정해진 것 같습니다만. 그는 그에게 주어진 소명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내면의 목소리가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정말 신이 얘기해 준 것일까요.


저는 제 자리에 대해 항상 의심합니다. 과연 여기가 정말 내가 있을 자리인가 싶은 거죠. 다른 일을 하면 더 잘하지 않았을까 뭐 그런. 여기에 있으면 저기가 좋아 보이고, 저기로 가면 또 거기가 좋아 보이는 거죠. 그렇다고 직장을 많이 옮겨다닌 것은 아니고, 주로 생각만 많이 했습니다. 그저 걱정이었던 거죠. 소크라테스가 우려한 자기 모순. '밤은 길고 나는 누워서 천년 후를 생각하네'라는 하이쿠가 항상 마음에 와닿았죠.


소크라테스는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는 걸까요. 특별한 적성검사나 성격테스트 같은 것 없이도 현재 자리에 대해 확신에 차 있습니다. 돈을 썩 잘 번 것 같진 않지만, 부럽습니다. 현재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마음이 남산 위의 저 소나무보다 단단할 것 같습니다. 그 확고함이 그의 현재를 풍성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네요.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일단 시작한 걸까요. 야간산행하듯 한 걸음씩 내딛다 보니 소명이 되고, 나를 이루게 되고, 오늘과 오늘이 모이면서 더 정성을 들이게 되는 걸까요. 현재에 충실하고 자신에 찬 힘 있는 삶, 살아보고 싶네요.


일단 한 곳에 자리 잡으면 위험을 무릅쓰고 자리를 지켜야 하며, 죽음이나 그 어떤 것보다 치욕을 염려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아테나이인 여러분, 여러분이 나를 지휘하도록 선출하신 지휘관들이 포테이다이아, 암피폴리스, 델리온에서 내게 자리를 정해주었을 때 나는 누구 못지않게 죽음을 무릅쓰며 내 자리를 지켰습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여해 싸웠던 이야기).

그러한 내가 나중에 나 자신과 남들을 탐구하며 철학자의 삶을 살라고 신께서 정해주셨을 때- 나는 그렇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죽음이나 다른 그 밖의 것이 두려워서 내 자리를 뜬다면,

나는 심한 자기모순에 빠질 것입니다.  


P.47 <소크라테스의 변론>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재를 지킵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지혜롭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죽음이 인간에게 사실은 최대의 축복인지 아닌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사람들은 죽음이 인간에게 최대의 불행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처럼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For the fear of death is indeed the pretence of wisdom, and not realy wisdom, being a pretence of knowing the unknown; and no one knows whether death, which men in their fear apprehended to be the greatest evil, may not be the greates good.  



헙. 죽음이 축복일 지도 모른다니요?! 소크라테스의 이런 발언은 삶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위험해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죽음과 그 너머는 경험해서 기록하거나 나눌 수 없습니다. 사실상 아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확실히 알고 경험한 것처럼 강하게 거부하는 개념입니다. 모르는데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맞네요.


확실히 우리는 죽음을 모릅니다.


저희 집 첫째가 이 부분 읽을 때 기웃거리길래 읽어줬습니다. 예비 초6인 아이는 소크라테스의 논리에 감탄했습니다. 그래도. 자기는 도망가서 살아야겠다고 합디다. 전쟁에 나가서 죽고 싶지도,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싶지도 않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바다의 여신 테티스는 아니기에, 또 아이가 소크라테스도 아킬레우스도 아님을 알기에, 웃으면서 '그래 그래' 했습니다. 저도 아이도 오늘을 대충 사는 것 같은데.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우리가 현재를 충만하게 사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는 걸까요.


죽음에 대한 저의 간접 경험들을 떠올려봅니다.


친할머니의 죽음, 고양이의 죽음, 친구네 강아지의 죽음, 기독교 교리에서 마주한 죽음과 그 너머, 불교의 해탈, 무속신앙에서의 신의 세계, 알라의 질서, 힌두교 세계에 가득한 신과 이야기들, 그리고 어느 여름밤 불영계곡 산속에서 마주한 칠흑 같은 어둠.


죽음은 그 어둠처럼 미지의 것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삶의 방정식에 미지수 하나 남겨두는 것도 괜찮은 것 같네요. 그게 저의 현재를 충만하게 해주면 더 좋겠습니다. 내일은 좀 더 만족스러운 하루가 될까요?


오늘의 소크라테스 변론 읽기도 잡생각과 질문이 가득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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