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서를 좋아한다. 위험하지 않은 공간에 책과 함께 있다면, 저마다 담긴 작은 세상으로 갈 수 있다. 그곳은 뜨거운 찜질방과 같아서, 평소 내가 숨겼던 작은 감정과 생각이 자연스레 피부와 호흡으로 나온다. 온몸을 그렇게 적시면 조금 더 나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독서를 좋아한다.
여행 중인 기차와 비행기는 특히 내가 좋아하는 독서의 공간이다.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그 책을 읽는다면 여행의 기억이 책과 함께 새록새록 떠올랐고, 나름의 기념품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일정에 맞춰 책을 챙겨가게 되었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혼자 유럽 여행을 떠났고 일정에 맞춰 3권의 책을 챙겨갔다. 그렇게 유럽 여행의 기억을 책에 조금씩 담았다. 영국을 여행하며 한 권의 책을 읽었고, 다른 나라로 떠나기 전 날 맥주를 마시며 식사를 할 겸 pub을 들리게 되었다. 더운 날씨에 지쳐 빠르게 맥주와 햄버거를 주문했다. 시원한 맥주가 먼저 나와 벌컥 들이키고 여유를 찾은 후, 이제야 주점을 둘러보았다.
주점은 시끄럽지 않았고, 바에 앉아 있던 나와 한 명을 제외한 사람들은 테이블에 앉아 각자의 대화를 나누었다. 이후 내 옆의 사람으로 시선을 돌렸고 이상한 장면을 보았다. 바에서 홀로 맥주를 마시던, 정돈된 수염과 광택 없는 뿔테 안경을 쓴 흑인 남자. 그 신사는 책을 읽고 있었다. 전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술로 흐려진 머리로 온전히 독서를 즐길 수 있을까? 작은 호기심을 간직한 채, 식사를 마치고 다음 여정을 위해 숙소로 돌아왔다.
작은 호기심은 점점 머릿속을 크게 채웠다. 다음 행선지의 저녁 식사에는 술을 곁들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책을 읽어야겠다고 계획을 정했다. 다음 행선지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샹그리아 없는 첫 저녁을 먹는 것은 아쉬움이 가득했다. 계획이 있었기에 겨우 참을 수 있었고, 이후 숙소로 돌아오며 책과 곁들이는 술을 구매하였다. 술은 당연히 샹그리아였다. 읽을 책은 연한 보라색 표지를 가진,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반딧불이'였다.
처음이라는 건 심박을 올리는 재주가 있다. 기대와 걱정에 반씩 두근거리며 밖에서 사 온 샹그리아를 컵에 따르고 책과 함께 준비를 하였다. 이후, 처음 해보는 일이었기에 고민은 자연스럽게 나의 순간을 멈췄다. 술을 약간 마시고 책을 펼쳐야 할까? 책을 읽다가 커피 마시듯 술을 마셔야 할까? 얼큰하게 취했을 때 책을 펼쳐야 하나? 오답 같아 보이는 선택지를 제하고, 가장 그럴싸한 선택을 했다.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산뜻한 포도향이 달콤하고 끈적한 액체와 같이 흘러들어 왔다. 인두와 식도로 넘어가며 알코올향이 살짝 올라왔고,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 평소처럼 목차와 작가의 말을 넘어 소설의 도입부를 읽기 시작했다.
술은 처음에 읽는 행위를 방해하였다. 혈류로 가득 찬 머리 때문에 한 문장을 두 번, 세 번 읽는 상황이 발생했다. 두 번째 모금을 마시기 전까지 읽은 3페이지는 평소보다 2배는 천천히 읽게 되었다.
살짝 붉어진 얼굴 이외에 남아있는 술의 흔적이 없어졌을 때, 한 모금 더 술을 마셨다. 과일 향은 더욱 강하게 코와 입을 휘저었고, 단 맛은 이전보다는 약하게 스쳤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독서는 계속되었다. 이제는 읽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빠르게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격한 사건 속에 내가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게 해 주었다. 어지럽혀진 머리는 등장인물들의 부끄러운 감정과 생각을 나도 떠오르게 하였다. 나와 비슷한 점을 무한히 대입하다 보니, 나의 모습을 이야기에서 찾고 있었다. 한정된 글자와 단어와 문장의 세상은 나의 세상과 합쳐져 별이 가득한 우주가 되었다. 그날 밤, 관성적으로 계속 책을 읽어 나갔다.
여행을 마친 후 최근까지 술을 곁들여 책을 읽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상에 시간이 뺏겨 책 표지가 무거울 때나 삶의 걱정과 생각에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 살짝 흐트러진 머리로 책을 읽고 싶어지곤 한다. 물론 모든 책과 상황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울리는 순간에는 어떤 촉매보다 술은 나를 더욱 몰두하게 만들어준다. 술과 책, 조명이 좋은 안전한 공간. 투자가 크지 않은 위대한 도전이지 않은가? 오늘 밤 술과 함께하는 독서는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