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헤르만 헤세 - 싯다르타

진리를 찾는 여행

by 성민

코끼리 한 마리가 방에 있다. 그 방에 여러 명의 맹인들을 들인다. 맹인들은 코끼리를 만진다. 시간이 지난 후 맹인들에게 방의 코끼리를 설명해 달라고 한다. 누군가는 펄럭이는 보자기 같다고, 누군가는 휘어지는 관 같다고, 누군가는 거대한 기둥 같다고 말하였다.

군맹무상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분의 지식으로 설명하는 세태에 관해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 전체, 그리고 본질을 보는 중요성을 코끼리에 대한 맹인들의 부적절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맹인들은 코끼리를 이해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만 했는가? 시간을 더 들여 코끼리의 모든 부분을 만져야 했는가? 코끼리를 볼 수 있는 누군가의 설명을 들어야 하는가? 그도 아니면 코끼리를 직접 보기 위해 본인의 시력을 되찾는 방법을 찾아야 했는가? 여러 방법들과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코끼리의 모습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통상적인 코끼리의 크기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무한하게 거대한 코끼리와 같다. 너무나 거대해서 평생을 만지고 설명을 듣는다 해도 온전한 모습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서 우리 '맹인'들은 다양한 태도를 취한다. 본인의 위치가 안전하기에 고수하는 사람. 의미를 찾기 위해 쉴 새 없이 모험하는 사람. 누군가의 설명 또는 기록을 보고 본질을 찾으려는 사람. 사랑하는 부분을 찾아 집착하는 사람. 다양한 태도가 있다면, 어떤 태도를 우리는 취해야 하는가?




주인공 '싯다르타'는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유년시절을 지냈으며, 여러 학자들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그는 갈증을 느꼈다. 진정한 행복과 영원한 만족을 원했으며, 진리를 추구했다.


싯다르타는 진리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자연스레 사마나(수행자)가 되었다. 진리는 본인에게 있으며 거대한 자아에 가려져 있다 생각했다. 자연스레 자신의 거대한 자아를 줄이는 수행을 하였다. 자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멸될 때 진정한 기적인 진리를 깨달을 것이었다. 그러나 수행은 자아를 죽일 수 없고, 자아에게 그저 도망쳐 잠시간의 번뇌에서 벗어날 뿐이었다. 사마나로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었기에, 그는 사바티로 향했다.


사바티에는 그가 갈구하는 진리를 깨우쳤다는 '고타마'가 있었다. 싯다르타는 고타마를 보고 한눈에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고타마의 설법을 들었고, 고타마와 운이 좋게 대화를 하였다. 고타마의 설법과 대화는 모두 이해가 되고 알게 되었지만, 진리를 찾지는 못했다. 그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렇기에 '앎과 깨달음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고 다시 진리를 찾으러 길을 떠났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배울 것이다. 나는 스스로 나의 제자가 될 것이다. 나는 나를,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밝힐 것이다.


이후 자아의 속삭임대로 속세에 들어가, 허무와 권태에 의해 망가졌다. 망가진 그는 뱃사공 바수데바를 만나, 강의 소리를 들으며 '본인의 진리'를 깨달았다. 마지막에는 단일성을 깨달은 싯다르타가 친구 '고빈다'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자신의 진리'에 대한 대답을 고빈다에게 보여주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싯다르타의 일생에서 그는 '자신의 진리'를 깨닫는다. 단일성이 바로 그것이다.

세상은 윤회한다. 사람은 언젠가 죽고, 시체가 되며, 썩어서 흙이 된다. 흙은 강도, 나무도, 짐승도, 하물며 사람도 될 수 있다. 그렇기에 흙이나 돌도 사람이 되어서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부처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아는 사실을 하나 떠올리자. 세상, 세계, 우주는 무한에 근접하게 거대하며 사라지지 않고 어떠한 형태로도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 세상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윤회를 할 것이다. 상류의 조그마한 물방울이 합쳐지고 흩어지는 과정으로 강이 되듯이, 우리는 세상 그 자체였을 것이고, 그럴 예정이고, 그렇다.

우리는 부처였을 것이고, 그럴 예정이고, 그렇다.


싯다르타가 고타마의 설법에 의문을 품었듯이 우리 또한 싯다르타가 깨달은 진리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나 또한 싯다르타의 진리를 읽으면서 몇 가지 예외와 반박이 떠올랐다. 나에게는 그것이 진리이자 세상이라는 이해가 닿지 않았다. 싯다르타의 진리를 나는 깨우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싯다르타의 인생, 그 여정 자체가 '나의 진리'를 조금 채워주었다. 싯다르타가 '깨달았다'는 구절에서, 진리를 깨달아가는 과정은 우리의 삶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는 것은 깨닫는 것과 다르기에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세존께서는 세존의 독자적인 구도를 통해 죽음으로부터 해탈을 얻으셨습니다.
당신의 독자적인 길에서, 사고를 통해서, 몰입 수행을 통해서, 인식을 통해서 해탈을 얻으셨습니다.
그것은 가르침을 통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책을 읽다 보면 싯다르타가 '깨달은 바'의 대부분이 이전에 싯다르타가 겪었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수의 독자들은 그런 싯다르타를 보면서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브라만으로 남아 있었다면, 고타마의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면, 사마나의 수행을 더욱 고집하였더라면... 싯다르타는 절망을 겪지 않고도 충분히 부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속된 말로 가성비 있게 진리를 얻을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싯다르타의 여정이 싯다르타가 알고 있던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고, 그 순간 진리가 된 것이다. 진리를 얻는 과정 또한 윤회와 닮았고, 결국에는 부처가 되었다. 싯다르타의 삶 중에서 단 한 부분도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그 모든 부분들이 모여 진리가 되었다.




다시 한번 거대한 코끼리를 만지는 맹인을 떠올려 보자. 코끼리를 알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고, 설명도 듣는다. 이미 수천수만 번을 만져보았다. 힘이 들어 잠시 포기도 했을 것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전혀 의미가 없어 보이는 행동이다. 맹인은 코끼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맹인이 '자신의 코끼리'를 이해하였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 코끼리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자신의 코끼리'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싯다르타의 모험 그리고 우리들의 삶과 같아 보인다. 하나 다른 점은 평가를 하는 제삼자가 없다는 점이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고, 우리가 도출해 낸 진리가 전혀 뚱딴지같은 이야기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리를 깨닫는 길은 제삼자(초월자)의 진실을 앎이 아니다. 마음 한구석에 진리에 대한 열망의 불씨가 조금이라도 살아있다면, 결국 언젠가는 부처가 될 것이다.


살다 보면 인생에서 버티기 힘든 순간, 행복이 극에 달하는 순간, 의미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간다고 생각되는 순간들이 무수하게 있다. 그러한 모든 순간들이 우리를 완성시켜 주고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도 부처가 되어, 누군가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는 순간이 오기를 항상 기도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