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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자규 Jakyu Chun Jul 30. 2024

1. 태풍의 전야. 큰 병 전에는 작은 병이 먼저 온다

투병의 시작

- 이 글은 현재 대장암 4기 투병 중인 저의 투병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쓰는 글입니다. 얼마나 자주 쓸 수 있을 지 모르지만, 몸이 허락하는대로 자주 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 오신 나그네 분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 모든 것의 전조


2011년에서 2012년 사이 즈음.


한창 대학원에서 석박사 통합과정을 밟고 있던 시절이었다. 누가 겨레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바라보라는 서울대 공대에 입학하여 학부를 4년, 교환학생 한 학기를 제외하면 7학기 만에 졸업하고 쉴 틈 없이 바로 대학원에 들어가서 석박사 통합과정에 돌입한 지 약 3년째였다.


3년 차는 박사과정 초창기에 해당하는데, 이는 자기 스스로 연구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시작하는 때이다. 그만큼 지도교수님의 요구사항도 많고, 지도교수님은 "내가 널 까지 않으면 그게 칭찬하는 것이다"라는 모토를 열심히 실천하사, 매번 실험 결과를 가지고 교수님과 대면할 때마다 털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해서 어떤 날은 실험실 냉장고를 주먹으로 쳐서 냉장고가 내 주먹 모양으로 함몰되기도 했었고, 우리 연구실의 실험 특성상 연구실에서 밤을 자주 새야 했던 고로 야식도 많이 시켜 먹었다. 스트레스를 해소해 보려고 이것저것 시도해 봤지만 (지금보다도 훨씬) 고립돼 있던 관악산 앞에 대부분 실패하고 결국 몸은 점점 골병이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혈변이 쏟아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설사가 나왔다. 예전에도 가끔 뭘 잘못 먹고 설사가 심하게 나온 적 있어서 '아, 이번엔 뭘 잘못 먹었나...' 생각하면서도, 혈변이 심상치 않아서 며칠 지켜보다가 병원으로 향했다. 서울대학교와 완벽히 서울 반대쪽인 대학로에 있는 서울대병원 의사의 진단은 궤양성대장염 (ulcerative colitis, UC)였다. 예전에도 장염이야 있었지만 이번 것은 궤를 달리 했는데, 장의 곳곳에 염증이 섬처럼 분포하는 일반 장염과 달리 궤양성대장염은 염증이 띠를 이루면서 항문부터 주욱 이어진다고 했다. 가수 윤종신 씨와 고 (故) 아베 신조 전 일본총리가 겪었던 크론병과는 서로 사촌지간이라 할 수 있는데, 그나마 항문부터 구강까지 온몸을 염증이 관통하는 크론병에 비해 이 녀석은 대장 내부로 범위가 국한되니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진단받고 주기적으로 주사치료를 받았는데, 약의 부작용이 심해서 주사를 맞다가 오한이나 발열 또는 질식이 찾아와서 주사를 멈췄다 다시 놓느라 주사시간이 터무니없이 늘기도 했었고, 그럼에도 증상이 쉬이 낫지 않았다. 그리고 주치의와의 마찰로 병원을 아산병원으로 옮겼고, 그 와중에 전문연구요원 시험을 합격해서 4주 훈련을 받으러 논산훈련소로 입소했다가 닷새만에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귀가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사실 궤양성대장염은 병역 5등급에 해당하는 난치성질환으로, 소위 말하는 면제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훈련소에 갔던 이유는 (최소한 그 당시에는)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군필 딱지는 당연히 달아야 한다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면제라고 하면 뭔가 불완전한 사람으로 보고, 취업 시에도 불이익이 있다는 흉흉한 이야기들이 있던 시절이었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입소했었다. 물론 결국에는 그렇게 되어버렸지만.


2. 그때에는 인생의 바닥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에도 총 3번 정도 입원했었다. 그중 가장 길게 입원했던 것은 2014년 봄. 거의 한 달 가까이 아산병원에 입원했었고, 아마도 기억에 이때부터 처음 스테로이드를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병에 걸리기 전 열심히 야식으로 찌워서 세 자릿수 몸무게에 육박했던 나의 몸은 반년만에 절반인 52 kg까지 빠졌었다. 급격한 체중감소에 근육이 당연히 버틸 리 없었고, 나의 관절들은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나는 걷거나 일어서는 것조차 정말 힘겹게 됐다.


내 방에서 화장실까지 5 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제때 못 가서 방바닥에 변을 쏟아내거나, 지하철 역사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해 바지에 변을 지리거나, 길을 가다 도저히 못 참아서 급히 근처 건물에 들어갔다가 잠긴 화장실 문에 좌절하고 계단실에서 몰래 쏟아내는 등, 쓰기에도 부끄러운 일들이 계속됐고 나의 자존감은 그야말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성당을 다니던 나는 밤낮으로 이어지는 고통에 밤마다 신을 저주했고, 거실에서 주무시던 엄마는 조용히 혼자 우셨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절친들이 집으로 문병을 와줬지만 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두 친구는 추욱 쳐진 나를 바라보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30분 정도만에 돌아갔다. 친구들은 아마 내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3. 그래도 날개는 완전히 꺾이지 않았었다


이렇게 처참한 상태였지만, 병원도 다니고 한의원도 다니고 로열젤리 등 영양식품도 챙겨 먹고 재활운동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하면서 완전하진 않지만 조금씩 회복이 되었다. 화장실 가는 횟수는 크게 줄지 않았지만 몸이 이 대장 상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했는지 다시 살이 오르고 체중도 조금씩 늘었다. 그렇게 2015년 가을에 7년 반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2016년 1월부터 2년간 독일에서 박사후과정 연구원으로 일할 수 있었다.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는 솔직히 스스로도 기적이라고 생각했고, 박사과정 중 쌓았던 학계 인맥을 통해서 독일로 갈 수 있게 됐을 땐 '아 나도 다시 날갯짓을 할 수 있겠구나'라고 되뇌이기도 했다.


독일에서도 계속해서 치료를 정기적으로 받으며 지냈는데, 이때의 치료는 스테로이드인 프레드니졸론을 많이 썼었다. 인생에서 학부 4학년 때 한 학기 교환학생으로 다녀왔던 것을 제외하면 장기간 자취는 처음이었기에 좌충우돌 생활이었고, 솔직하게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2년간 서부 독일의 거친 겨울날씨와 맛없기로는 영국음식과 비견되는 독일음식에 지쳐 계약을 더 연장하지 않고 귀국하여 반년 휴식하며 몸을 추스르고 (역시 엄마밥이 최고였다) 취직 준비를 한 후 (그 당시 내 전공인 무기재료공학 관련 채용을 많이 하던) 현 직장인 LG화학에 입사했다.


부모님 댁에서 직장인 강서구 마곡지구까지는 대중교통으로 왕복 3시간 거리였기 때문에 회사 근처에서 인생 두 번째 자취를 하면서 병원도 직장 근처인 이대서울병원으로 전원했다. 대장질환자이기에 매년 대장내시경을 하며 지속적으로 관찰했다. 주사약을 바꿔가면서 약물치료를 계속했지만 큰 차도는 없었고 그렇게 고요하면서도 불안한 5년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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