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를 기억하는 바다의 거인, 고래상어

조용한 교감, 그 위에 남겨진 시간의 기록

by 정로그

드넓은 바다를 유영하는 거대한 그림자, 고래상어. 웅장한 몸집 뒤에는 인간과의 특별한 교감이 숨어 있다. 마치 오랜 친구를 기다리듯, 다이버의 손길에 조심스럽게 몸을 맡기는 고래상어의 모습은 단순한 과학적 발견을 넘어 마음 깊은 곳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서호주대학교 연구팀은 10년에 걸쳐 이 거대한 생명체의 행동을 섬세히 관찰해왔다. 호주 닝갈루 리프 인근의 고래상어들은 자신들의 몸에 붙은 기생충을 제거해 주는 인간의 존재를 기억하고, 심지어 그들의 도움을 기다리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 처음에는 경계의 눈빛을 보내던 고래상어가 반복되는 손길에 마음을 열고, 이젠 눈가나 지느러미처럼 민감한 부위까지 스스럼없이 내어주는 모습은 신뢰라는 감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기억의 습관: 인간을 '청소 생물'로 인식하다


초기엔 다이버들이 조심스럽게 기생충을 떼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몇몇 고래상어들은 다이버가 다가오면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었고, 심지어 몸을 기울여 도움을 청하듯 행동하기도 했다. 단순한 즉각적 안도감이 아니라, 반복된 긍정적 경험이 쌓이며 인간을 '이로운 존재'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번 연구를 이끈 브렌던 오소리오 박사는 이를 "인간을 청소 생물처럼 인식하게 된 결과"라고 설명한다.

2.PNG 고래상어 입 주변에서 기생 요각류를 채집하고 있는 장면 ⓒVioleta J Brosig(Blue Media Exmouth)

우리가 무심코 건넨 손길 하나가 거대한 생명체에게 안도와 신뢰의 상징이 될 수 있다면 그 순한 눈빛 속엔 어쩌면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어는 없지만 감정은 조용히 전해진다.


고래상어 몸 위의 타임캡슐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작은 기생충들이 고래상어의 식습관을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이다. 고래상어는 주로 야간이나 심해에서 먹이를 찾기 때문에, 그들의 식단을 직접 관찰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고래상어 피부에서 채집한 기생 요각류의 탄소와 질소 동위원소를 분석해 장기적인 식이 패턴을 추적했다.

3.PNG 고래상어 피부에서 채집한 기생 요각류 샘플을 분석을 위해 보관하는 모습 ⓒAndre Rerekura(AIMS)

UWA 해양연구소의 마크 미칸 박사는 이 방식을 '고래상어의 식단 일기'라고 부른다. 기생충은 단순히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고래상어 삶의 단서를 간직한 작은 생명체였던 셈이다. 이 비침습적 분석은 기후 변화와 해양 오염으로 위협받는 고래상어의 보호 전략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 속에도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다. 고래상어가 기억하는 따뜻한 손길, 그리고 그 몸에 붙어 오랜 시간을 함께한 기생충. 이 모든 관계는 인간과 자연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던진 작은 선의가 다른 존재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어떤 연결을 만들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난 손길은 말 없이도 전해지고, 언어 없이도 신뢰를 쌓을 수 있다는 것.
함께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이런 조용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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