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니 저절로 나이가 한 살 더 늘었다. 어릴 적에는 나이 먹은 것에 크게 괘념하지 않았는데 -좋을 때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한 살 더 많아진 나이가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거기에다 눈, 귀, 그리고 다리의 관절까지 더 부실해지니 속이 상하다.
허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 구부정해지고, 가는 귀를 먹은 것은 아니라고 변명하지만, 청력이 나빠진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에 바꾼 돋보기를 써도 안개 낀 것처럼 앞이 흐리니 시력이 더 나빠진 것이 분명하다. 그래 나는 나이 들어서 좋은 것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다리와 허리가 나빠져서 걸음걸이가 느려진 것도 생각해 보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빨리 걷다가도 간혹 다리의 관절이 뻣뻣해지면 걸음을 멈추고 쉴 수밖에 없다. 그때 나는 전에 보지 못했던 주위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풀포기 사이에 납작 엎드린 풍뎅이의 금청록 색 겉 날개에서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오묘한 색을 발견한다. 풀섶에 핀 갈퀴 꽃의 애잔한 보랏빛 미소를 훔쳐볼 수 있다. 또 주위의 사물에 관심이 더 많아 걸음이 느린 어린아이들과 동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귀가 어두워져 좋은 점을 찾아보자. 상대가 귓속말로 소곤거려 듣지 못한 말이라면, 십중팔구 남의 험담일게다. 칭찬이나 듣기 좋은 말을 작은 소리로 말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귀가 나빠져도 확실하고 좋은 이야기는 들을 수 있고, 흉을 보거나 나쁜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은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다가도 나쁜 말인듯 싶으면 귀가 어두워서 못 들은채 해버린다. 뭐라고? 못 알아듣겠네.’를 연발하면서. 아니 즐거울 수 있겠는가.
말이 느려진 것도 과히 나쁠 것 없다. 나는 말을 암팡지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자연히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상대가 화를 내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말이 느려진 덕분에 잘못 전해질 낌새가 보이면 바로 그칠 수 있게 되었다. 빠르게 말하였더라면 다툼이나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는데 도중에 그쳤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더구나 내 말에 갑갑증을 느낀 젊은이가 참지 못하고 제 말을 먼저 한다면, 나는 싱싱하고 젊은 생각을 거저 얻을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허리가 아픈 것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허리가 꼿꼿할 때는 상대방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버릇이 있어서 도도하다는 말을 들었다. 통증 때문에 자꾸 허리가 구부정해지니 고개를 고추 세울 수 없게 되었다. 자연히 시선도 아래로 향한다. 허리가 굽었으니 조금만 더 숙이면 인사가 된다. 그래 나는 자주 인사를 한다. 아주 공손하게.
얼굴 여기저기에 기미와 죽은 깨가 생기는 것도 화낼 일만은 아니다. 얼굴에 잡티가 생기지 않았을 때는 햇빛에 조금만 타도 걱정스러웠다. 여기저기 검버섯까지 돋으니 이제 어찌해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 오히려 해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얼굴을 가릴 필요도 없다. 모자나 양산 따위 집어던지고 눈부신 햇빛 아래 산책하는 즐거움을 어디다 비기랴.
기억력이 나빠진 것은 더욱 좋은 일인 것 같다. 애면글면 속을 끓이던 일도 잊게 된다. 나빴던 기억도 까맣게 잊는다. 반면에 좋았던 기억은 가슴속에서 자라고 살이 찌워가니 그것도 참 좋은 일이다. 읽은 책을 다시 읽을 때도, 전에 느꼈던 것은 다 잊고 새롭게 감동한다. 감동할 일이 많지 않은 세상, 감동적인 책이 많지 않은 세상에 읽은 책을 다시 읽고 전과 꼭 같은 느낌을 얻는다는 것은 더없는 행복이다. 또 만나서 좋을 것이 없는 사람은 ‘난 모르는 사람인데.’하고 외면해버리면 그만이다.
생각하면 눈이 나빠진 것은 좋은 것 중의 으뜸이다. 나는 남들의 결점을 참 잘 찾아냈다. 그것은 뛰어난 관찰력 때문이라고 자화자찬했다. 그러나 한두 개의 단점은 잘도 찾아내면서 흔한 장점 한 가지를 찾아낼 줄 몰랐으니, 그것이 문제다. 그런데 이젠 시력이 나빠져서 다른 사람의 결점 같은 것은 아예 찾지 못한다. 반면에 그 사람이 지닌 장점이 가슴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얼마나 다행인가.
머리카락이 허옇게 된 것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방바닥에 떨어진 까만 머리카락 한 올은 눈에 거슬린다. 불결해 보인다. 그러나 흰 머리카락은 덜 하다. 또 그것은 내 머리카락이 아니고 실오라기라고 짐짓 모른 채 할 수도 있다.
늙어가니 좋은 사람을 가슴속에 담아둘 필요가 없어서 좋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말해도 둘 사이에 칙칙한 감정 따위가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남들도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따뜻한 마음의 교류는 나를 더 풍요롭게 해준다. 또 상대가 이렇다 할 반응이 없더라도 화가 나지 않고 부끄럽지 않다.
밤길도 무섭지 않게 되었다. 시커먼 남자가 따라와도 괜찮다. 시력이 나빠진 것이 분명한데 밤에는 어딘가에 숨어있던 또 다른 눈이 떠진다.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별들이 보이고, 몽유병에 걸린 나무가 창밖에 서성이는 소리가 들린다. 낮 동안 위엄을 자랑하던 산이 길게 누워서 어깨를 들먹이며 잠든 모습도 보인다. 반쪽짜리 하현달이 눈물을 그렁거리고 있는 것도 보인다. 모두 확연히 보인다.
나이를 먹는다. 올해 한 살, 내년에 또 한 살, 그 후년에는 또 한 살……. 이렇게 자꾸 많아지겠지. 그러면 나는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더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