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자, 강릉.
“이번 주말에 강릉에 다녀오려고 해.”
생각으로만 지녔던 있던 목적지를 타인의 입으로 들었을 때, 나는 이를 운명이라 여겼다.
하루 정도 쉴 요량이었다. 소중한 하루를 어디에 어떻게 쓸까,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나’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했다. 불현듯 강릉을 떠올렸다.
-당일치기로 한번 강릉엘 다녀와 볼까?
소심히 던져본 질문에 딴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렇게 먼 곳까지 일부러?
-월미도도 혼자 안 가봤으면서 그 먼 데까지 가서 뭘 어떻게 하려고?
겨우 떠올린 설렘이었지만, 막연함과 두려움이 그렇게 강릉을 떠나보냈다. 그러고 나서 강박이라도 걸린 것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검색했다. 소중한 하루를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럼 뭘 할까, 서울이라도 갈까. 시간은 흐르고 마땅한 것은 없었다. 마음이 살짝 조급해질 때 즈음, 나는 친구를 만났다.
나름 중요한 약속이었다. 그녀의 소개팅 후기를 듣기 위한 자리!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새로이 시작될 그녀의 연애를 응원하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친구의 입에서는 내가 겨우 흘려보낸 도시 이름이 나왔다. ‘강릉’ 나는 생각으로만 그쳤던 그 장소를, 친구 녀석이 가겠다는 거다. 게다가 혼자서.
나는 여행의 단꿈에 젖어있는 그 친구를 보았다. 어떻게 해도 마냥 즐겁기만 한 계획도 들었다. 아니, 사실은 들리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은 ‘강릉’으로 채워진 후였기 때문에. 연신 그 애에게 나는 부럽다, 나도 다음 주에 쉴 건데, 나도 갈까 말을 붙였다. 친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같은 말을 내게 해주었다. 나의 마음을 보름달처럼 부풀게 만들어줬던 그 말.
언니, 언니도 가자.
생각해 본다. 나는 왜 하필 강릉이었을까. 하니, 몇 장면이 순차적으로 떠오른다.
하나, 십 대. 중학교 졸업여행이었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이제는 희미해진 한 소녀가, 내게 부탁했다. 자기가 짝사랑하는 남자아이의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우리는 오죽헌에서 그 남자애의 뒤꽁무니만 쫄쫄 따라다니며 사진 찍을 틈을 노렸다. 결국 성공하진 못했다. 풋내 나는 사랑을 돕지 못한 조력자의 이야기.
둘, 이십 대. 대학을 막 졸업했을 무렵, 좋아하는 선배 언니들과 강릉을 찾았다. 겨울 밤바다 앞에서 우리는 영상을 찍으며 각자의 젊음을 기록했다. 지금보다 더 치기 어리고 불안했던 내 청춘의 기록. 부끄러워 어딘가 내팽개쳤는데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난 그때 뭐라고 했을까. 이젠 그 시절의 나를 마주할 용기 정도는 생겼는데. 젊은 날의 '나'는 허무하게 도망가버렸다.
셋, 삼십 대. 인생의 분기점이라고 생각했던 시기. 오래된 친구들과 여행을 갔었다. 파라솔에 기대어보고 발을 적셔보기도 하며 여름바다를 만끽했다. 선교장이라는 곳에서 고택체험을 해봤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렸다. 우리 셋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멍하니 빗소리를 들었었지. 조르르 기왓장 아래로 떨어지는 빗소리 들으며, 우리는 아무도 지키지 못할 다음 여행을 기약했었다.
그런 강릉이 나에게 손짓하고 있다. 뭐 해, 어서 오지 않고. 이쯤이면 또 새로운 기억을 쌓을 때가 됐잖아? 그리고 이번엔 좀 유쾌하게 다녀가는 건 어때?
친구 녀석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손을 빨리 놀렸다.
바다 앞에 위치한 숙소를 예약하고 강릉행 기차표를 샀다. 그렇게 운명에 순응해 보기로.
나, 강릉에 좀 다녀올게.
2023. 11. 29. 떠나기로 결심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