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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Jun 13. 2024

5. 반환점 그 어딘가에서

돌아올 때쯤에야 숨통이 트였던 그날 오후

마라톤을 즐겨하는 친구가 말해준 적이 있다.

- 언니, 마라톤 할 때 있잖아. 일직선보다 반환점을 찍고 오는 코스가 더 수월하다?

- 어째서?

- 그 길도 한 번 가본 길이라고, 내가 안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더 짧게 느껴져.

 반환점 그 어딘가.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그 친구를 내리 생각했다. 당장 말해주고 싶었다. 너의 말이 백번 맞다고.




페리를 타고 모지코 항으로 이동했다. 그곳 세관의 비롯한 건물이 너무 예뻤다. 말 그대로 좋은 배경이 되어주었다. 나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남동생을 여동생에게 부탁했다. 가족들과 보폭 맞추기를 포기했다. 걷다가 멈춰 서서 렌즈를 통해 항구를 바라다보았다. 그런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아빠였다. 프레임 속으로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도 역시 아빠였다. 초점도 맞지 않는 채로 희뿌연 하게 드러나셔서 히죽 웃어 보이셨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사진이나 실컷 찍어드려 보자며 본격적으로 자리를 물색했다. 나는 용케 목이 좋은 곳을 골라냈다. 약간 애매해서 사람들이 찍지 않을 법한, 그러면서도 이곳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나는 자리를 잡고 기세 좋게 말을 꺼냈다. 아빠 저기 가봐, 엄마 이렇게 자세 취해봐, 너네 그렇게 있어. 나는 가족을 진두지휘하며 사진을 찍어댔다. 같은 배경을 두고 수십 장의 사진이 나왔다. 우리는 웨딩 스냅을 찍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서로를 찍고 찍혀 주었다.

우리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모지 세관, 너무 예뻤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질릴 만큼 찍었다며 한바탕 웃어넘기고 시계를 보아하니, 오후 두 시를 넘겼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유명하다는 야키 카레를 도전해 보기로 했다. 식당 앞에는 시간을 불문하고 대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줄 맨 끝에 자리를 잡았다. 10분쯤 되었을 때, 종업원이 나오더니 sold-out이라고 말해줬다. 여동생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 그럼 모지코 항에서의 일정은 이게 끝인데 시간이 좀 뜬다. 주변에 카페라도 들렀다 갈까?

- 좋아.

카레 집 근처에 오래된 카페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건네주신 메뉴 책자에는 일어만 쓰여 있어 도통 읽을 수 없었다. 번역 앱을 돌려가며 메뉴를 해석하고 있는데, 똑쟁이 동생은 sns로 찾아낸 먹음직스러운 음료를 릴스를 보여주며 주문해 보자고 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담뿍 담긴 멜론 에이드였다. 마법의 음료였다. 아무리 먹어도 양이 줄지 않았다. 컵의 바닥이 보일 때쯤에는 열기로 잠시 꺼졌던 배가 다시 꽉꽉 채워졌다. 나는 동생에게 말했다.

- 이제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공간과 음료가 몽환적이었던 그곳.


우리는 모지코 역에서 고쿠라 역으로 무탈히 돌아왔다. 하카타로 돌아가기 전에 고쿠라 성을 둘러보기로 했다. 지도를 살펴보니 버스 타고 가나, 걸어 가나 걸리는 시간은 비슷했다. 걸어가기로 했다. 남동생에게 지도 읽어달라며 휴대폰을 맡겼다. 나는 그가 지시하는 대로 직진, 우회전, 좌회전을 반복했다. 초행길이 주는 스트레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게 하는 더위, 장시간 걸으며 생긴 발바닥 통증으로 인한 피로감이 극에 달했다. 남동생이 응원의 말을 건넸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물이나 먹으면 좋겠단 생각으로 앞만 보았다.

힘겹게 도착했다. 남동생은 초입에서 성을 조용히 올려다보니, 본인은 올라가지 않겠다고 했다. 민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를 남겨두고 성을 한 바퀴 돌았다. 아주 천천히, 마치 반환점을 돌듯이. 그리고 다시 출발했다. 친구가 말했던 것처럼, 이제는 '아는 길'이 되어버린 길 위를, 나는 달렸다. 피로감은 그대로였고 발바닥은 더 욱신거렸지만 신기하게 마음은 가벼웠다. 동생의 농담을 받아칠 수 있게 되었다.

동생이 나를 올려 보내고 올려다보았을 고쿠라 성. 다음엔 너도 꼭 올라가 볼 수 있기를.

하카타 역에는 오후 다섯 시를 조금 넘겨 도착했다. 지인 찬스로 내가 추천했던 야키니쿠 집을 도전해 보기로 했다. 예약은 이미 만석이라 현장 대기만 가능하고 그마저도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한단다. 괜찮다고 했다. 원래 저녁은 여섯 시에 먹는 거니까. 부모님께은 한 시간 기다리면 딱이라는 말을 둘러대며 대기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래도 설마 한 시간을 채우려나 했는데, 정말 한 시간이 넘어서야 종업원과 다시 대화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 자리가 좁은데 괜찮겠냐, 다음 예약까지 그 자리가 한 시간이 비는데 그 안에 먹을 수 있겠냐.

- OK, OK!

당연한 걸 왜 물어. 다 오케이지, 안 그래?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식당에 들어섰다. 다섯 명은 4인석에 옹기종기 앉았다. 그러고는 메뉴를 닥치는 대로 눌렀다. 특수부위 3-4인분, 양배추 샐러드, 채소, 밥 한 그릇, 내 하이볼 한 잔 그리고 엄마의 비빔밥까지.(회복한 엄마가 한식으로 식사할 수 있게 되셔서 참말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주로 삼 남매가 고기를 해치웠다. 쉴 틈이 없었다. 먹다가 속도까지 붙어서 특수부위를 추가 주문했다. 두둑해진 배를 둥둥 두드리며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45분. 우리 가족은 그 큰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하루 중 제일 뿌듯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시 마무리가 좋으면 좋은 거다. 오늘 여행도 순항으로 마무리 지었다.

함포고복의 현장. 특수부위의 이름도 익히지 않았다. 고기는 구워지는 대로 입으로 보냈다.


이제 막 익숙해진 곳을 내일이면 떠나야 한다니.

여행도 삶도 그렇다. 반환점에서 돌아오면 그 코스는 끝이 나고 새로운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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