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세탁기, 집 그리고 당신

"두껍아, 두껍아. 헌 세탁기 줄게, 새집 다오."

by nomad

당신은 고집이 세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든 실천해 내고야 만다. 재미있는 게임을 발견하면 밤을 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끝을 본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당신의 성이 고집 '고' 씨가 아니냐고 물었다. 당신은 그저 씩 웃었지. 그 '결심'을 한 날도 아마 끝을 보리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으리라.




우리의 결혼 생활이 차곡차곡 쌓여 강산이 변할 때쯤, 손때 묻은 것들이 이상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TV화면에는 검은 멍울이 한 두어 개 생기기 시작했고 청소기는 먹었던 먼지를 게워 냈다. 노트북이 게을러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세탁기 앞에서는 고개도 못 들었다. 우리 집 세탁기로 말할 것 같으면 난폭한 군주 저리 가라였다. 평형을 맞추는 받침대를 내팽개치질 않나, 달달 울어 재끼질 않나. 간절한 마음으로 AS 기사님을 호출했다. 기계 노후화로 베어링을 교체해야 할 것 같다며 50만 원이 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내외는 대번에 새로운 세탁기를 알아보기로 했다. 이참에 건조기도 같이 사기로 했다.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수리를 기다리던 쪽이 더 길다면 길었을 테다. 그리고 드디어 고장 난 세탁기로부터의 해방을 기다리던 배송 날,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우리 아파트가 구축이라 세탁실의 폭이 너무 좁단다. 다시 말해, 요즘 세탁기가 들어가기 어렵다는 거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 뒤따라오는 절망감은 얼마나 크던지. 배송 기사님들은 어쩔 수 없네요,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세탁기와 함께 돌아가셨다. 당신은 그날 하루 내내 웃지 않았다. 당신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음을 나는 그저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어버이날을 맞아 혼자 친정 나들이를 하던 5월의 첫 주말의 오후였다. 초여름의 미지근한 바람이 머리를 흩뜨려놓았다. 정리하려고 손을 머리 위로 올리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당신이었다. 머리칼이 헝클어진 채로 전화를 받았다. 당신은 내게 단도를 불쑥 던졌다.

"집 팔렸어."

"뭐?"

잠시 후, 전화를 끊은 내게 친정 식구들이 뭐길래 호들갑을 떠냐고 했다. 들은 그대로 전달했다. 모두 나와 같은 반응이었다. 뭐? 친정가족을 비롯하여 내 몫까지 걱정을 한가득 들고 와서는, 돌아오자마자 당신에게 무슨 바람이냐 물었다.

"세탁기가 안 돌아가니까. 이사를 해야겠어.“

이미 며칠 전에 집을 내놓았단다. 그러고 나서 내가 집을 비운 그 토요일에 노부부와 자제분들이 집을 다녀갔단다. 저층이었고 깨끗하게 쓴 편이라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두루두루 살피다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약의 뜻을 밝혀왔다고 했다. 다음날에는 시댁 식구들이 총출동하여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으니 다음 주에는 나와 함께 다녀야 한다고 통보했다. 고작 이틀을 비웠는데,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눈 깜짝할 새에, 당신은 불확실성의 바다에 온몸을 내던졌다. 그럼에도 당신의 얼굴에서는 설렘이 보였다. 푸석했던 당신의 얼굴에서 아주 오랜만에 발그레한 생기가 돌았다. 혹시, 세탁기가 죽어가면서 당신을 살린 건 아닐까.


다음 주말엔 당신을 따라다녔다. 어쩌려는 심산인가 싶어 팔짱을 끼고 바라봤다. 하지만 그 마음이 오래가지 않았다. 상황은 금세 뒤집혔다.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발품을 팔면 팔수록, 눈이 절로 커졌다. 남편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집을 사랑했다. 나름 신경 써서 꾸며왔고 애착을 듬뿍 가졌다. 그러나 신축 아파트의 공간 활용 기능은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 집을 가면 이 집의 우리 것이었으면, 저 집을 가면 저 집이 우리 것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신은 신중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지리적 조건을 따져가며 목적한 바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아갔다. 그러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마음에 쏙 드는 집을 발견했다. 공인중개사를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집주인과 지루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의 몇 번의 통화와 질긴 협상의 줄다리기 끝에, 당신이 생각했던 예산보다는 약간의 웃돈을 주고 집을 구하게 됐다. 당신은 결국 성공했다.




어느덧 이사를 마친 지 두 계절이 지나고 세 번째 계절을 보내고 있다. 새 세탁기는 남편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문제없이 잘도 돌아간다. 어김없이 건조가 끝났다는 짤막한 노래가 울린다. 나는 따뜻하게 데워진 빨랫감을 꺼내며 생각해 본다. 당신 고집 덕분에 내 삶도 변곡점을 맞이했다. 그 변화가 썩 나쁘지는 않다. 이제 당신의 다음은 어디일까, 무엇일까. 그때는 당신에게 좀 더 힘을 실어줄까. 함께 더 활기차게 유영(游泳)할 수 있도록. 그나저나,


여보, 다음엔 미리 언질이라도 주고 고집 피워줘.


새 집에서 바라본 새벽녘 하늘. 아직 고층의 하늘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2025.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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