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때 선배들에게 지겹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이야 평생 다닐 것 같지~? 3,5,7의 저주는 무조건 오게 되어있어"
"3,5,7의 저주요?"
"응, 입사하고 3년 차, 5년 차, 7년 차 때마다 슬럼프가 오거든. 대부분 그래"
"에~ 저는 이 회사 평생 다닐 거예요 선배님!"
"글쎄~"
이 회사에서 평생 뼈를 묻고 다니기로 마음먹었는데, 3년 차 5년 차 7년 차라니.
난 절대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 같이 3년 차에 찾아왔다.
슬럼프란 놈이.
일주일 중에서 월요일 아침이 제일 싫었고, 화요일과 수요일도 역시나 싫었다.
나중엔 그렇게 기다리던 금요일 저녁조차 별로 기쁘지 않았다.
'어차피 2일만 쉬면 다시 또 월요일이잖아?'
출근이 얼마나 싫던지 일요일 저녁엔 이를 닦다가 눈물이 주르륵 흐르기도 했다.
주말에 만난 친구들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이 정도면 스트레스가 심한 거 아니냐고
휴가를 길게 내고 여행을 다녀오거나 아니면 그냥 퇴사를 하고 쉬라는 조언이 내게 쏟아졌다.
"첫 직장에 3년 차면 많이 다닌 거야, 그렇게 스트레스받지 말고 퇴사하고 좀 쉬는 건 어때"
"그래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받으면서 뭐하러 다녀. 우린 아직 어린데 뭘 고민해"
퇴사?
휴식이라는 말에 잠시 흔들렸지만, 퇴사라니! 입사할 때 평생 다니려고 마음먹은 회사인데!
살다 보면 입사할 때의 마음과 다르게 퇴사하고 이직할 순 있겠지만,
아직은 새롭게 해보고 싶은 일도 없었고 돈도 더 벌어야만 했다. 관둘 수 없다.
지금 퇴사를 하지 않을 거라면, 당분간은 회사에 다녀야 하는데 이렇게 우울하게 다닐 수는 없지.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나의 슬럼프의 원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입사하고 처음에는 실수도 많이 하고 사고 친 거 수습하느라 너무 힘들었는데,
요즘에는 대부분의 업무가 다 아는 내용이고 크게 실수한 적도 없는데 왜 출근이 하기 싫은 걸까.
후배들도 입사하다 보니 잡일도 많이 줄어드고.. 뭐가 문제인 거지?
아, 익숙함과 지루함의 그 어디쯤에 난 지금 속해 있는 건가.
회사에 점점 적응하고, 일이 익숙해지다 보니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지겨워지고 딴생각이 드는 건가 싶은
마음에 그날부터 하루의 이벤트를 만들기 위해 약속을 잡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친구와의 약속을 잡는다면, 좀 더 활력 돋지 않을까?
친구들과 쇼핑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이쁜 카페에서 회사 욕도 하고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니깐 전보다는 조금 나은 거 같았지만 여전히 회사가 너무 싫었고, 창구에서 번호를 호출하는 일이 지겨웠다.
특히 나를 제일 지겹고 힘들게 했던 큰 원인은 고객들의 똑같은 질문이었다.
"이 현금 카드는 어떻게 쓸 수 있는 거죠?"
"대출을 갚아야 하는데, 보안카드 사용 방법을 모르겠어~"
"이 안내장이 집으로 날아왔는데, 이게 무슨 뜻이에요?"
질문은 다양했지만, 대부분의 고객들이 묻는 내용은 비슷했고
가끔은 내가 창구에서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로봇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1년 뒤에도 난 여전히 이 자리에서 똑같은 안내만 되풀이하고 있는 걸까. 아 너무 지겹다.
정말 친구들의 말처럼 퇴사밖에 답이 없는 걸까 하고 괴로워하던 어느 날,
플라자에 고객용으로 비치되어있는 잡지를 보게 되었는데 한 연극배우의 인터뷰가 실려있었다.
Q. 연극배우라는 직업은 똑같은 대사를, 매일 반복해야 하는데 힘드시지 않나요?
라는 질문에 그의 화사하게 웃은 사진 옆에 답변이 적혀 있었다.
A. 가끔은 저도 지겹다는 생각을 하죠. 몇 개월 동안 같은 대사를 반복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제가 100번째 말하는 대사라도, 제 앞에 있는 관객분은 처음으로 듣는 내용이잖아요?
그분의 이 연극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이 완벽했으면 하는 마음에 전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글을 읽는데, 마치 그 답변이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래. 나는 고객에게 백 번째 말하는 내용이지만 이 고객은 나에게 첫 번째로 물은 질문이 아니던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래 슬럼프 따위는 날려버리고 다시 시작해보자.
본인의 시간을 내서 여기까지 온 고객들에게 이런 마음으로 응대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도 회사 출근하는 게 엄청 즐겁진 않았지만, 전보다는 나아진 기분이었고
평생 다니 자라는 마음 대신 우선 1년만 버텨보고 그 이후에 다시 결정하자 라고 마음을 바꾸니
끝이 보이는 느낌이라 답답함이 많이 해소되었다.
업무 하다가 슬럼프가 온다면 생각해보자.
정말 내가 이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이 하고 싶어서 출근하는 것이 미치도록 싫은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익숙해져서 이 모든 것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회사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출근은 달갑지 않고,
퇴근이 너무너무 좋은 건 항상 똑같다.
이건 슬럼프가 아니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