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색되어 가는 직장인들의 익명 게시판..
아침 8시 47분.
커피 머신 앞에서 누군가 툭 던진다.
“저기… 블라인드 보셨어요? 난리 났던데.”
이 한 문장으로 하루가 시작되는 회사가 있다. 아니, 요즘은 대부분의 회사가 그렇다.
블라인드는 이제 회사원들의 또 다른 유튜브이자 인스타이다.
출근길에 보고, 점심 먹다 보고, 화장실에서 보고, 퇴근길에도 본다.
좋아요 버튼을 누르고, 댓글로 감정을 소비한다. 경영진도 안 본 척할 뿐, 안 보지는 않는다.
비서실, 대외협력, HR, 심지어 전담 조직까지 두고 “요즘 블라인드 분위기 어때?”를 매일같이 보고받는다. 혹자는 기자들이 모니터링 한다는 소문도 있다.
회사원들의 신문고.
정보 공유의 장이자 위로의 공간.
때로는 폭로의 창구. 물론 다 믿지는 않는다.
블라인드 글 열 개 중 일곱은 허수라는 걸,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안다.
“이건 좀 소설인데?” 하면서도 스크롤은 멈추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나머지 셋이다. 묘하게 정확한 이야기.
내부자만 알 법한 숫자, 일정, 인물 관계.
그리고 몇 달 뒤, 그 글이 사실로 드러날 때의 그 싸한 기분. 그래서 우리는 안다.
믿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내가 믿고 싶은 쪽으로 믿어버린다는 걸.
블라인드는 여론몰이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성과급, 복지, 조직개편, 인사. HR이나 총무와 맞닿아 있는 이슈들은 어느 순간 비슷한 톤의 글들이 연달아 올라온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교하다.
그리고 또 하나. 마녀사냥. 단서 몇 개.
직급, 성별, 부서 힌트. 사람들은 추리한다.
“이거 ○○팀 그 사람 아니야?”
회사판 B급, C급 영화가 개봉되고 우리는 감독도 아닌데 결말을 예측하며 도파민을 소비한다.
이 모든 혼란 속에서도 블라인드는 분명 재미있고, 솔직하고, 날 것의 공간이었다.
적어도 예전에는.
요즘은 조금 다르다.
같은 그룹사인데, 영업적자가 나면 특정 회사 직원들을 욕한다.
같은 회사인데, 본부가 다르다고, 팀이 다르다고 서로를 깎아내린다.
“쟤네는 늘 저렇지.” “그래서 저 부서는 안 된다니까.”
회사도 어렵고, 시장도 어렵고, 우리 모두가 버티고 있는 이 시기에서로를 향한 말은 유독 날카롭다. 사실 회사가 힘들 때 서로를 격려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래도 고생 많다”
“이번엔 다 같이 버텨보자” 이 한마디면 될 텐데.
블라인드는 여전히 도파민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소모의 공간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문제를 드러내는 건 필요하지만, 사람을 갈라놓는 데 쓰이는 건 조금 슬프다.
오늘도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블라인드 보셨어요? 또 난리던데.”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조금은 다른 난리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헐뜯는 난리가 아니라, “그래도 우리끼리는 좀 버텨보자”는 그런 난리 말이다.
회사에 다닌다는 건 원래 애환의 연속이지만, 적어도 같은 배를 탄 사람끼리는 노를 들고 서로를 내려치지는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