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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구 Feb 06. 2023

요란하지 않은 충만함

2023 1/29 - 2/4 포르투, 그라나다, 론다 일주일 여행

일주일은 무언가를 시작하고 끝내고 돌아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하루 이틀의 서러움이나 실수에 너그러워질 수도 있고, 서너번 정도 반복하다보면 일상이 차곡차곡 쌓여 한 달을 만드는 7일. 내겐 연구도 여행도 딱 일주일이 요란하지 않으면서 충만함을 갖게 해주는 주기다. 수업과 부담감으로 쉽지 않은 두 번째 학기를 보내게 될 것이라 각오했음에도 떨어지는 자신감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듯 출국 이틀 전 완전히 방전되었음을 느꼈다. 잠시 옥스퍼드를 떠나 해가 잘 들고 따뜻한, 맛있는 음식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가득한 포르투갈과 스페인 두 세 지역을 정해 출발했다. 이 정도 길이의 여행은 3년 만이다.






먼저 도착한 곳은 포르투. 포르투는 이번 여행 테마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오렌지빛 노을을 바라보는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새로 학기가 시작하며 사진 동아리에 가입하게 됐는데 그 기념으로 일회용 필름 카메라도 들고 갔다. 지금은 빛과 풍경을 담는 것만 잘해도 만족이지만 궁극에는 사람들을 잘 찍고 싶다.

평소 거의 하지 않는 빈티지 쇼핑과 동화/그림책방에도 다녀왔다. 아주 마음에 드는 가방과 가디건을 샀고 '변화'라는 제목의 그림책도 한 권 선물 받았다.





화이트 포트와인은 하이볼만큼이나 자주 생각이 날 술이 되었고, 이걸 직접 만든 나타와 함께 먹었던 순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예정이다.

더이상 낭만을 좇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한지 꽤 되었다. 낭만을 꿈꾸게 하는 기저에는 어떤 형태로든 현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돌아갈 일상에 대한 생각을 자주 했지만, 문득 내가 어떤 것들에서 생의 의지와 충만함을 맞이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했다. 충분한 움직임과 좋은 날씨, 맛있는 음식, 애정하는 소수와의 대화. 일상을 떠난 곳에서도 행복을 느끼게 하는 요소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구글맵에 보이는 아무 곳에나 들어가도 맛있었던 샌드위치. 좋았던 점은 재료들 간의 조화와 적당함이었다. 나는 평소에 아주 양껏 먹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다른 재료와 어우러지는 맛이 없으니 하나를 왕창 먹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얇은 샤워도우 한 장에 여러 재료가 추가되면 이렇게 배도 적당히 부르고 풍족한 식사를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영국에선 뭔가 어우러지는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으니.












다음 여행지는 스페인 그라나다. 이동 첫 날부터 현수교 트레킹을 다녀왔다. 난이도가 아주 높지도 아주 낮지도 않아 만족스러웠던 체험! 무엇보다 이곳에서도 오렌지빛 석양을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딱딱하고 조금은 굳어있던 마음에 따뜻한 낭만이 스며드는 기분이 새롭고 오묘하고 감사했다.




타파스도 인상적이었다. 음식에 있어서는 포르투에서 받은 인상과 유사했다. 포션 자체가 아주 큰 1인분은 아니지만 재료가 잘 어우러지고 무엇보다 함께 나오는 소스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샹그리아와 레몬맥주와 같이 먹었던 문어감자샐러드와 트러플크림 크래커 맛도 잊지 못할 것 같다.

사실 스페인은 거리도 그렇고 식당 분위기도 그렇고 영국과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물론 음식의 맛과 날씨는 아주 달랐지만,, 지난 130일 정도의 시간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국에서의 삶에 어느 정도 적응했구나- 하는 안도감도 찾아왔다. 지난 호 <조용한 생활>에서 극도의 절제에서 오는 쾌락이 있다는 말도 생각났다. 많은 것들을 꾹꾹 눌러담으며 중심을 잃지 않으려 절제해오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었달까. 이렇게 여유를 가지며 찾아오는 쾌락만큼이나 내가 절제하며 즐겼던 쾌락도 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론다로 이동. 그라나다에서 기차로 3시간 정도 이동해서 도착한 곳에서 본 누에보 다리는 장관 그 자체였다. 오로지 이것 하나를 보기 위해 방문한다고 해도 후회가 없을 정도. 포르투에서는 자연 경관 그 자체에 감탄했다면, 그라나다와 론다에서는 지형을 살린 건축 형태에 놀랐다. 인간의 가능성이란,,









알함브라 내부 나스르 궁전. 아주 거대한 건축물 자체보다는 이런 구체적인 문양들에 시선을 뺏겼다. 이런 섬세함은 수세기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있었다. 어떤 일의 구체에 닿는다는 것이 주는 아름다움에 마음도 즐거웠다.

여행 경험도 쌓이고 좀 더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면 명소보다는 작고 일상적인 동네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런 궁전은 뭐랄까, 큰 감흥은 없달까!







일상으로 돌아와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충분한 단백질이 들어있는 샌드위치, 요거트, 각종 대체유를 섞은 커피다. 여행지에서처럼 소수의 사람들과 깊이 있게 나누는 대화가 좋고 적당한 움직임은 에너지를 채워준다. 다만 이런 일상에 가끔 낭만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는 것 같다. 같은 것도 조금 다른 장소에서, 조금 더 풍족하게, 그리고 여행이라는 핑계로 나를 잠시 놓아줄 수 있는 시간과 공간들. 이런 낭만 덕분에 남은 시간 정신도 마음도 좀 더 꼭 붙잡고 갈 수 있을 것이란 믿음도 얻어왔다. 아무튼 정말 충분했던 일주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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