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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남 Apr 18. 2023

6. 겸손한 당신

삼십 년 만에 다시 음악을

노란 은행잎이 길에 흩날리던 2016년  어느 가을밤, 나는 여의도 국민일보 건너편의 긴 택시 줄에 서 있었다.

국민일보 옆의 태영빌딩에는 유명한 회계법인이 있어 많은 회계사들이 야근을 밥 먹듯 한다.

늦은 밤에 빌딩의 사무실에 불이 밝혀 있으면  택시들이 길게 줄을 선다.

맨 뒤에 선 나는 우연히 순복음교회 방향을 바라보았는데, 보훈회관  에서 택시에 노인 두 분이 타시고, 공손히 배웅하는 한 남자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 택시기사에게 주고는 또다시 노인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였다.

택시가 출발하자 그도 택시를 타려는지 이쪽 편을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나는 곧바로 이동하여 그 앞에 차를 세웠다.

그는 원주에 갈 수 있냐고 물었고  내가 승낙하자 조수석에 올랐다.

그는 마포대교를 건너서 강변북로를 타고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하라고 했다.

강변북로에 차가 진입하자 그가 '저의 아버님도 몇 년 전까지 택시기사 이셨어요.'라고 하였다.

나는 '네, 그러세요? 지금은 은퇴하셨나요?'라고 묻자, 그는 보름 전 세상을 떠나셨어요.'라고 했다.

나는 '연세가 어떻게 되셨는데요?' 하고 묻자,

'82세 이셨어요. 평생을 성실하게 사셨지요.

아버지는 한국전 참전용사 이시고, 조금 전 떠나신 두 분은 아버지의 전우들 이세요.

아버지 장례식에 오셨던 분들인데, 제가 답례로 식사접대를 하고 가는 길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아버지는 저의 친아버지가 아니세요.

저는 친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유복자이에요.'

나는 '네, 그러셔요?'하고 대답하며 어떤 사연인가 궁금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기사님, 담배 한 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하며 물었다.

나는 '네, 피우세요.' 하였다.

그는 담배 연기를 창문밖으로 날리더니 그의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저의 어머니는 서울 후암동에 살았고, 처녀 때 한 남자를 사귀었대요.

그 남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반공포로였고 가난했데요.

어머니가 임신이 되자 그는 오징어배를 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며 속초에 갔는데 그 후로 소식이 끊기고 행방불명이 되었데요.

나는 태어나서 외갓집에서 할머니 손에 자랐어요.

어머니는 큰 외삼촌이 근무하는 문산의 미군부대의 식당에 취직이 되어 일주일에 한 번만 집에 오셨어요. 내가 다섯 살 때 어머니는 다리를 저는 한 남자를 데리고 집에 오셨어요.

그 남자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제대하여 같은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분 이셨어요.

다음날 나는 그들을 따라 문산으로 갔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아저씨에게 아버지 라  부르라 했어요.

아버지는 저를 이뻐하셨고 얼마 후 여동생이 태어나  행복하게 살았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미군 감축이 시작되자 우리 가족은 서울 구파발에 작은 집을 사서 이사를 왔어요.

아버지는 곧바로 택시기사를 하셨어요.

이른 새벽에 아버지가  출근하시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곤 했지요.

저는 고교 졸업 후 곧바로 군에 지원 입대를 했는데 취사병이 되어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제대 후 학원도 다니며 자격증을 획득하고, 고급식당에 취업했어요. 그곳에서 아내 될 사람을 만났고 결혼도 했어요.

저와 아내는 식당을 창업해 보고  싶었어요.

모은 돈이 얼마 되지 않아 은행에서 대출을 하려니 재산세 납부 실적이 있는 보증인이 필요했어요.

저와 아내는 집에 찾아가 대출보증을 여쭈었어요.

어머니는 난처해하시며 '아버지가 아끼시고생하셔서 겨우 장만한 집인데 위험해서 담보를 서줄 수 없다'라고 거절했어요.

묵묵히 듣고 있던 아버지는 '부부가 둘 다 요리사인데 식당이 실패할 리가 없다. 여보, 보증 서줘요!' 하셨어요.

친 아들도 아닌데 아버지는 저를 신임했어요.

식당은 너무나 잘 되었고  돈을 많이 번 나는 미국 유학을 가고 싶어 하는 여동생의 유학비용을 모두 대 주었어요.

저는 처갓집이 있는 원주 국도변의 싼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대형 식당을 렸지요.


세월이 흐르고 연세가 많아지신 아버지는 감기가 한번 걸리더니 그 후로 쇠약해져서 자주 아프셨어요.

두 달 전에는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완전히 회복을 못하시고  중환자실에 계셨어요.

의사는 연세가 많으셔서 회복이  쉽지 않다며 준비하셔야겠다고 하셨지요.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가 전쟁에서 부상 입고 하사로 제대한 상이군인이니 현충원에 묻힐 수 있나 알아보라고 했어요.

보훈처에 간 나에게 담당자는 검토를 해 보더니

'아버지는 전쟁영웅이시군요. 훈장을 받으신 분에게는 묘지는 없지만 납골당 안치는 가능합니다'라고 했어요.

저는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낡은 가방을 뒤져서 화랑무공훈장을 찾아냈어요.

아버지는 자기 자랑 한번 안 하신 겸손한 분이셨거든요.

저는 어릴 적 생각이 났어요.

아버지와  함께 길을 걷는데 저 앞에 학교 친구들이 보였어요. 저는 다리를 절룩이는  아버지가 창피해 뒤떨어져서 걸었지요. 그때의 나의 행동은 너무나 비열했어요.' 하더니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꼈다.

잠시 후 그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자, 나는 '어릴 때는 그럴 수도 있어요.' 하며 그를 위로했다.

'결국 며칠 후 아버지는 숨을 거두셨고 화장을 한 후 유골을 안고 현충원에 갔어요.

납골당 입구에는 연락을 받은 헌병대장이 '훈장을 받은 군인에게는 예우가 있습니다.'라고 하며

8명의 헌병이 거총을 하며 의식을 치러주었어요.

우리는 너무 영광스러웠어요.

오늘은 장례식에 오셨던 아버님의 전우 분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아버지의 전투사를  들었어요.

화천의 고지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되고 부상을 입었는데도 동료들을 지키며 끝까지 싸우셨데요.

저는 돈 많이 번 것이 성공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처럼 죽어서도 존경을 받는 인간이 되겠다고 다짐했어요.

저는 내일 그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주었을 고급 외제차를 팔아서 생활이 어려워 보이는 아버님의 전우분들에게 나누어 드릴 계획이에요. '

차는 원주 교외에 위치한 그의 대형식당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를 존경하는 그의 마음을 담은 가사가 떠 올랐다.

그리고 나의 자녀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나도 겸손하고 성실하게 살아 사후에도 자녀들에게 존경받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겸손한 당신


오랜 세월 묵묵히

살아온 당신은 우리 아버지

있는 듯 없는 듯

겸손하게 살아 택시기사입니다.


이제야 우린 깨달았어요

당신은 훌륭한 아버지예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별을 보며 집을 나서는

흰머리가 늘으신 우리 아버지

오직 하나 가족을 위해

소박하게 살아온 택시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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