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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남 Apr 18. 2023

4. 인생은 상자 안의 초콜릿

삼십 년 만에 다시 음악을

(그림 : 저자의 막내누나인 김연자)


늦은 오후, 아내가 음식을 만드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내일이 설이라 준비하는 음식이 많은 것 같았다.

예전에는 명절이라도 간단히 곰국이나 끓이고 잡채정도만 만들고 하더니, 지난여름 아들이 결혼하자 며느리 눈치를 보는지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백 년 사위라는 말이 있었는데 요즘은 며느리가 큰 손님이란 느낌이 든다.

아내는 아들 내외가 온다고 하면 대청소를 하고 평소 먹기 힘든 한우도 넉넉히 넣고 뭇국도 넉넉히 끓였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택시기사도 휴일이지만 지갑이 가벼운 나는 집에서 쉬는 것이 편치 않았다.

얼마라도 벌어서 아들 내외가 떠날 때 택시 타고 가라며 돈을 주고 싶었다.

집을 나서는데 아내가 '명절 전날 밤에 무슨 손님이 있겠어요? 얘들이 내일 아침 8시쯤 온다고 했으니 늦지 말고 일찍 들어오세요.' 하였다.

나는 7시 전에는 들어와 샤워도 하고 옷도 단정히 입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리에 나와 보니 정말 한산했다.

연휴가 이미 이틀 전에 시작되어 고향 갈 사람들은 이미 이동이 끝난 모양이었다.

영등포역에 와서야 겨우 손님을 태웠는데 목적지가  가까운 국회의사당 건너편이었다.

손님이 하차한 후 서강대교 못 미쳐 우회전하였는데, 저 멀리 어둑해진 켄싱턴 호텔 앞에 사람이 보였다.

다행히 그들은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칠십대로 보이는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그를 부축하고 있는 여인은 그 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노인을 부축해 택시에 탄 여인은 마포 먹자골목에  영업하는 식당으로 가 달라고 했다.

나는 마포대교를 건너 곧바로 용강동에  도착했으나 명절 전날이라 불이 켜진 식당은 없었다.

용강동을 다 지나고 대흥역 방향으로 가다가 신호에 걸려 정차하자, 여자가 영어로 남자에게 말했다.

'나 정동진에 가고 싶어요. 매년 신정에 일출을 보았는데 올해는 아버지 간호하느라 못 갔거든요.'

그러자 남자가 '못 갈 거 없지. 기사한테 갈 수 있냐고 물어봐.' 하였다.

여인이 나에게 갈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갈 수 있다고 하자,  요금을 물어보았다.

나는 고속도로비를 포함해 현금으로 삼십만 원을 요구했다.

그러자 여인은 왜 꼭 현금으로 내야 하냐고 물었다.

나는 '오늘은 쉬는 날인데 내일이 명절이라 아이들 세뱃돈이라도 넉넉히 주려고  일을 나왔으니 가능하면 현금으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대화를 하더니 여인은  '좋아요. 고속도로에 들어서면 첫 번째 휴게소로 가세요. 그리고 식사 후  ATM 기기에서 현금을 인출해 줄 테니 출발하세요.' 하였다.

나는 올림픽도로를 타고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해 곤지암 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는 한산했다.

그들은 나에게 같이 식사하자고 했지만, 나는 식사한 지 얼마 안 되었다며 정중히 사양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얼마 후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각자 화장실로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몸이 불편한 남자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화장실에 갔다.

나는 그에게 '메이 아이 헬프 유?' 하고 묻자,

그는 '오우! 유켄 스픽 잉글리시?' 하며 너무 반가워했다.

그는 나의 도움을 받아 용무를 마치더니 커피숍에 가자고 했다.

그의 돈을 받아 내가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 왔다.

그는 한 모금을 들이켜더니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판단했는지 유창한 영어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올해 나이가 칠십 인 한국계 미국인이오.

내가 네다섯 살 때쯤 한국전쟁이 났고 희미한 기억으로 평양부근에 살았던 것 같소.

중공군이 개입하여 아군이 후퇴하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데도 우리 가족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어요.

갑자기 피난길에 폭격을 받고 아수라장이 되자 나는 엄마의 손을 놓쳤고 눈보라 속을 헤매었어요.

어두워지자 나는 추위와 허기로 쓰러졌는데, 아침에 후퇴하던 미군들에게 발견되었소.

그들은 나를 따듯하게 담요로 감싸고, 과자를 먹여주고 사탕을 한 개 주고는 떠났지요.

나는 그들과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울면서 그들 뒤를 따라갔어요.

중대장은 나를 뒤돌아 보며 안 되겠던지, 등에 메었던 배낭을 부하에게 맡기고 나를 업었어요.

후방에 도착하자 나는 귀염둥이로 그들 숙소에서 같이 지냈어요.

휴전이 되자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중대장은 정이 든 나 때문에 고심했지요.

그는 커다란 백팩에 나를 숨기고 수송기를 탔어요.

미국에 도착하자 천사 같은 그의 아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며 나를 예뻐했어요.

나는 그들의 아들이 되었고 공부를 잘해 부모님들을 기쁘게 해 드렸지요.

나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군인이 되려고 웨스트포인트에 합격했어요.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임관되며 베트남에 파병되었지요.

처음 한 달간은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어요.

어느 날 소대원을 이끌고 야간수색을 나갔는데 그만 베트콩의 매복에 걸렸어요.

부하 한 명이 그들이 설치한 지뢰를 밟으면서 폭발로 부하는 날아갔고 적의 총격이 불을 뿜었지요.

나는 후퇴를 외치며 언덕아래로 몸을 숨기려다가 발을 디뎌 아래로 굴러 떨어졌어요.

그리고 일어나려는데 머리에 충격이 오며  쓰러졌어요. 정신을 차려 눈을 떠 보니 적 두 명이 총구를 내 머리에 겨누고 있었어요.

그들은 나의 팔을 뒤로 묶고 목에 밧줄을 걸어 가축처럼 산으로  끌고 갔어요.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는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큰 나무에 나를 묶어놓고는 계곡으로 내려갔어요.

아마도 음식을 숨겨놓은 것 같았어요.

그때 갑자기 고양이 만한 부엉이가 날아와 맞은편 나무에 앉더니 나를 노려 보았어요.

그놈이 내가 묶인 것을 아는지 입을 쩍쩍 벌리더니, 내 눈을 빼먹으려는지 날개를 확 펴며 달려들었어요.

그때 계곡에서 바위가 쪼개지는 듯 한 폭발과 섬광이 번쩍이고 총소리가 악을 썼어요.

란 부엉이는 날개로 내 얼굴을 때리더니 급히 달아났어요.

잠시 공포의 적막이 흐르더니 발자국 소리가 들렸어요.

그러다가 무전 치는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는 베트남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어릴 적에 들었던 한국어였어요.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본능적으로 한국어로 절규했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잠시 후 플래시를 비치며 군인들이 언덕을 올라왔어요.

그들은 한국에서 파병된 무섭다고 소문난 맹호부대 였어요.

중대장은 영어가 능통했고 미군장교임을 확인하자 무전을 쳐서 헬기를 보내라고 했어요.

나는 이국의 지옥에서 피가 같은 형제에게 구원을 받았지요.


며칠 후 병원에 있던 나를 중대장인 박 대위 님이 면회 왔어요.

나는 목숨을 구해준 그를 형님으로 삼고 본국의 연락처를  주고받았어요.

근무 기간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제대하고 무역회사에 취직했어요.

결혼도 하였는데 아이가 생기지를 않았죠.

진단 결과 고엽제 때문이란 걸 알았어요.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자 나는 한국을 방문하여 형님을 재회했어요.

그리고 한국제품이 우수하고 저렴함을 확인하고는 미국에 돌아와서 회사를 창업하고  한국제품을 수입했는데 큰돈을 벌었어요.

어느 날 형님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딸이 미국 대학에 합격하여 유학을 가니 보살펴 달라는 것이었어요.

나는 형님의 딸을 내 조카처럼 잘 보살펴  주었고, 틈나는 대로 찾아갔어요.

4년 후 졸업식에 간 나에게 그녀가 내 품에 꼭 안기는데 그 눈빛이 뜨거운 것을 알았어요.

나는 모른척하고 냉정하게 그녀를 한국으로 보냈지요.

아내는 유방암으로 십 년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어요.

한 달 전 나는 갑자기 뒤로 쓰러져 병원에 후송되었는데 왼편 손과 발에 감각이 없었어요.

나는 재활치료를 받던 중 그녀의 연락을 받았어요.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였어요.

나는 이틀 전 한국에 입국하여 그녀와 함께 형님이 잠든 현충원을 방문했지요.

그리고 어젯밤 그녀가 이혼하고 홀로 지낸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불구가 된 이 노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거였어요.

나는 어쩔 줄 몰라하며 그저 그녀 손을 잡고 밤을 보냈어요.'

그때 우리를 찾던 여인이 커피숍 문을 열었다.

'저 여자가 바로 대위의 딸이오.'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라디오에서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가 흐르자 여인이 '기사님, 볼륨 좀 높여주세요.' 라고 말했다.

나는 보이지 않아도 여인의 뜨거운 손이 남자의 차가운 손을 잡고 있을 거란 상상이 들었다.

새벽 두 시에 정동진에 도착한 나는 그들을 호텔에 내려주고 어두운 바닷가에 차를 정차했다.

그가 정글로 끌려가던 모습이 상상되며 검은 파도 위로 그 영화가 떠 올랐다.

'포레스트 검프'

베트남 정글의 비 오는 밤, 수색을 하며 제니를 그리워하는 포레스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영화의 대사를 인용해 음악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서둘러 서울로 향했다.

잠 한숨 안 자고 쉬지도 않고 집에 도착하니 방학이라 알바를 뛴  딸도 돌아와 있었다.

나는 삼십만 원을 아내에게 주며 며느리 돌아갈 때 택시비를 주라고 했다.

아내는 놀라며 '구정 전날에 웬 돈을 이렇게 많이 벌었어요?' 하며 좋아했다.

아들 내외가 와서 식사를 하고 세배를 받은 후 며느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에 빠졌다.

그날 저녁 나는 곧바로 가사 작업에 착수했다.

1절은 베트남전 이야기

2절은 무작정 달리기

후렴은 어머니의 유언

모두 영어로 썼다.


이곳은 한 달 내내 비가 온 적도 있었어, 제니!

비가 그치고 별이 보이면 너도 보였어.

표범 같은 댄 중위는 우리 소대장이고

새우잡이 배의 선장이 꿈인 버바는 나의 친구야.


중위는 도망치라고 소리쳤지.

나는 너무 빨리 달려 그들과 멀어졌어.

나는 다시 돌아가 부상당한 소대장을 구했지.

그리고 죽어가는 버바의 소원을 들었어


인생은 상자 안의 초콜릿이었어.

너는 절대 알 수가 없어, 너의 앞날을.

어머니가 말했지,

인생은  상자 안의 초콜릿이었어.

너는 절대 알 수가 없어, 너의 앞날을.


네가 떠난 후 나는 달리기를 시작했어, 제니.

내가 잘하는 것은 이것뿐이었어.

뛰다가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었지.

그러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어.


가끔 산속의 호수가 거울처럼 잔잔할 때면

나는 마치 두 개의 하늘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어.

산봉우리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를 때도

너는 항상 내 곁에 있었어.


2016년 설날에 가사를 쓰기 시작한 이곡은, 완성하는데 6개월 정도 걸렸고, 수백 번 연습을 한 후 2018년 10월에 녹음하였다.

녹음실 가기 며칠 전, 연습을 하다가 보니 음이 없는 독백 부분에 나도 모르게 멜로디가 붙어 있었다.

전화기에 녹음하여 비교해 보니 오히려 멜로디가 있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막내누나가 이미지 그림을 그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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