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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별 Toni Oct 31. 2023

어린이에게 배운 영어 원서 읽는 법

어렵다고 주저하지 말고, 내 취향에 맞는 스토리로 시작하자!

  토요일 오후 4시, 구립 도서관의 어린이 열람실. 엄마 손에 이끌려 아이들이 하나둘 이야기방으로 들어선다. 아이가 영어와 부디 친해졌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엄마들이 아이를 선생님 앞에 앉혀 놓는다. 이런 엄마의 마음을 알 길이 없는 아이들은 그냥 밖에 나가서 놀고 싶다. 앉은 자세가 삐딱하다. 몸이 배배 꼬인다. 선생님이 영어 그림책 표지를 보여주며 아이들의 주의를 끈다. 한 명씩 차례차례 눈을 맞춘다. 목소리와 얼굴에 감정을 가득 담아 스토리텔링을 시작한다. 그림과 영어와 한국어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아이들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책 속 그림과 선생님을 번갈아 보는 아이들의 눈이 진지하다. 깔깔 웃다가, 걱정으로 잠시 찡그렸다가, 다시 안도한다. 십 분, 길어봤자 이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책 속 주인공과 모험을 떠난 아이들, 선생님은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펼쳐졌을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하다.



  지역 구립 도서관에서 영어 그림책 읽어주기 봉사를 삼 년가량 한 적이 있다. 봉사를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걱정과 우려가 앞서 긴장할 때가 많았다. 방 뒤쪽에 앉아있는 엄마들이 나의 영어 발음을 흉볼 것 같았다. 아이들이 영어 때문에 그림책에 집중하지 못하면 어쩌나, 내가 고른 책을 재미없어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되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이런 고민이 사라졌다. 아이들과 스토리를 매개로 하나가 되는 값진 경험들이 쌓여 가면서 걱정 대신 행복을 선물로 받았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들과 나눈 교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삼 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경험을 바탕으로 나의 의견을 말해보자면, 아이들은 확실히 기승전결 스토리가 있는 책을 좋아한다. 그림책의 종류는 다양하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딱 맞는 웃긴 책도 있고, 재미로 포장한 교육용 책도 있다. 웬만한 그림책은 다 웃고 즐길만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가장 집중하는 책은 스토리가 담긴 책이다. 주인공이 시련에 부딪히고, 모험을 떠나고, 결국 뭔가를 이루어 내는 이야기에 빠져드는 아이들을 보면서, 스토리를 좋아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영어 그림책을 듣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영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림을 보는 동안 상상력을 가미하여 자신만의 스토리를 완성해 나갈 뿐이다. 영어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게 생길 리 없다. 유치원에서 혹은 영어학원에서 배웠던 단어가 선생님 입에서 나오면 반가워서 신이 나고, 선생님이 생소한 말을 해도 톤과 억양으로 짐작이 가기 때문에 몰입에 방해받지 않는다. 영어는 억지로 주입되는 교육이 아니라 그저 모험의 주인공이 사는 나라의 언어로 여겨질 뿐이다.


  원서 읽기를 시작해 보자고 마음먹은 성인의 경우는 어떠할까? 책이 너무 좋아서 작가가 직접 쓴 원문을 읽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로 원서를 찾게 된 사례도 있겠지만,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목적으로 원서 읽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평소 책을 즐겨 읽음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처음에는 영어 공부를 목적으로 원서에 접근했다. 그래서 나의 영어 레벨에 맞는 아동용 책을 골라서 읽기 시작했다. 나의 어휘 수준이 성인용 책을 읽을 만큼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동용 책은 무난하게 읽어나갈 수 있었지만, 재미가 별로였다. 결국, 서너 달이 지난 후 더는 원서를 읽지 않게 되었다. 미국인 남편이 아동용 책을 읽고 있는 내 옆에서 원서로 ‘파친코’를 읽고 있을 때, 그저 부럽기만 했다. ‘파친코’를 나도 원서로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는 전혀 해보지 않았다.



  그로부터 서너 해가 지났을까, 원서 읽기에 다시 도전하게 되었다. 2021년 가을, 우연히 블로그를 통해 원서 읽기 온라인 모임인 ‘리북스’를 알게 되었다. 코로나 여파로 집에만 갇혀 지내다 보니 사람과의 교류가 그리웠고, 미국에 살고 있지만, 영어 공부가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되어 심란하던 시기였다. 고민할 것도 없이 리북스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 가입했다. 리북스가 어떻게 돌아가는 시스템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때마침 ‘파친코’를 함께 읽자는 모집 안내를 봤다. 바로 그 ‘파친코’란 말이지. 묵혀두었던 킨들을 서랍에서 꺼냈다. ‘파친코’를 이북으로 구매했다. 두 번째 원서 읽기 도전에서도 가장 큰 목적은 영어 공부였다. 어떤 식으로라도 장시간 영어에 노출이 되면 실력이 좀 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렇게 ‘파친코’를 시작으로 이 년이 지난 지금까지 원서를 읽고 있다.


  그렇다면 첫 도전에서 실패했던 원서 읽기가 두 번째에서는 성공한 원인이 무엇일까? 바로 스토리의 힘이다. ‘파친코’를 읽는 동안 영어보다는 책 속에 펼쳐지는 서사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영어 공부라는 목적은 지워지고 없었다. 물론 내 수준보다 높은 어휘들이 책 속에 넘쳐났다. 손가락으로 단어를 끊임없이 클릭하며 사전을 불러내야 했다. 그런데도 이런 수고가 짜증스럽지 않았다. 남편이 읽었던 그 ‘파친코’를, 알고 보니 나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첫 영어 소설 읽기가 성공하자 새로운 세상에 들어선 것처럼 신이 났다. 


  원서 읽기에 도전하고 싶지만, 어떤 책으로 시작할지 망막한 사람이 많다. 각자 영어 레벨도 다르고 취향도 다양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답은 없다. 그러나 딱 하나 당부하고 싶다. 자신의 영어 레벨에 맞는 책을 선정해야 한다는 선입견은 버리자. 세상에는 다양한 스토리가 존재한다. 그중 내가 끌리는 스토리를 선택한다면, 그 책이 설령 나의 영어 실력으로는 버거운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끝까지 따라가게 된다. 번역서처럼 술술 읽히면 좋으련만, 온갖 성가심과 좌절이 나를 괴롭힌다. 그래도 악착같이 원서를 읽게 하는 게 바로 스토리의 힘이다. 스토리는 소설은 물론 비소설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나는 지금, 내가 들려주는 스토리를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듣고 있던 도서관의 아이들과 같다. 작가의 스토리텔링을 따라 모험을 떠난다. 간혹 작가가 하는 말이 외계어 같아 어리둥절하다. 그러면 작가의 어조에 상상력 한 숟가락을 듬뿍 넣어 멋대로 버무린다. 계속 모험을 따라간다. 내가 상상하는 세상이 작가가 그린 세상과 맞아 떨어지는지 알 수 없다. 아무려면 어떠랴. 나는 원서를 읽고, 내게 멋진 스토리를 들려주는 선생님이 있고, 내 손을 잡아 이끄는 주인공이 있다. 이거면 충분하다.


  토요일 오후 4시. 상상의 문이 열리는 시간. 마음먹으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열 수 있는 토요일 오후 4시의 문. 아이들이, 어른들이 그 문을 자유롭게 드나들기 바란다. 책 말고, 영어 말고, 공부 말고, 원하는 스토리를 만나 부디 신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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