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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별 Toni Oct 28. 2023

엄마의 게으른 영어 원서 읽기

북클럽에 가면 토니가 있지

 온라인 북클럽에서 내 이름은 ‘토니’이다. 이 이름을 다시 사용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재 하루의 반은 토니라는 자아로 살고 있다. 토니라는 이름은 영어 어학원에서 일할 때 급조로 지은 것이다. 당장 영어 이름을 만들어서 출근하라고 하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좋아하던 배우 양조위의 영어 이름인 토니를 따라 지었다. 첫 수업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 학년 어린이들 앞에 서서 ‘내 이름은 토니야’라고 자기소개를 하는데, 아이들이 모두 키득거렸다. 알고 봤더니, 토니는 초급 영어 교재에 등장하는 빨간 아기 공룡의 친구였다. 그래서였을까, 새로 온 선생님인 나에게 아이들이 친근하게 굴었다. 내 수업을 듣지 않는 아이들조차 복도에서 마주치면 토니라고 부르며 즐거워했다. 멋지고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 양조위의 위엄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고, 빨간 공룡을 옆에 둔, 귀엽고 깜찍한 소년 토니가 되어 오 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년 전 온라인 북클럽에 가입하면서 닉네임을 만들어야 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근사한 걸로 지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또다시 토니였다. 전업주부의 인생을 선택하기 전, 오 년 동안 영어 선생님 토니로 살던 시절이 그리웠던 것일까. 빨간 공룡과 신나게 놀던 토니가 다시 되고 싶었던 것일까. 사연 없는 닉네임은 없다. 북클럽 멤버들은 가끔 내가 왜 토니라는 남성적인 이름을 가졌는지 궁금해한다. 사실은 귀엽고 깜찍한 빨간 공룡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 사연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온라인 북클럽에서 환생한 토니는 좀 달라진 것 같다. ‘언제 이렇게 똑똑해진 것인가, 영어는 또 왜 이렇게 잘해, 말도 잘해, 아주 이성적이야, 리더로서 적합해’, 북클럽 사람들이 평가하는 토니이다. 이들이 말하는 토니는 도대체 누구인가. 분명 내가 토니를 만들어 낸 게 맞긴 한 데, 이런 토니가 아주 낯설기만 하니, 이게 무슨 곡할 노릇인가. 환생한 토니가 맘에 들기도 하고, 가짜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 어색하기도 하다. 그래서 토니를 한번 관찰해 보기로 했다.


  토니는 원서를 눈으로 읽지 않고 입으로 읽는다. 불경을 외듯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눈으로 읽으려고 입을 꾹 다물어봤지만 도통 집중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귀로 듣는 건 어떨까? 마찬가지로 집중력은 몇 분을 넘기지 못한다. 오디오북이 배경 음악으로 전락하면서 딴생각에 빠져 버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중얼중얼 입으로 책을 읽는다. 토니의 중얼거림이 몇 날 며칠이고 계속되자, 옆에 있던 토니의 남편과 딸이 시끄럽다고 짜증을 내는 바람에 지금은 가족들이 거실에 있을 때는 혼자 방에 들어가서 중얼거린다. 왜 중얼거려야만 책이 읽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한 채, 토니는 오늘도 원서를 읊는다. 어떤 날은 한껏 기분에 취해 오디오북 성우처럼 감정을 실어 본다. 그럴듯하다며 혼자 만족해한다. 어떤 날은 목소리 톤을 아주 많이 낮추어 본다. 또 어떤 날은 만사 귀찮아서 작은 목소리로 대충 흘려 읽는다. 북클럽에서 하루 책 읽은 분량을 낭독으로 인증하는데, 가끔 자신의 녹음 분량을 들어보면 민망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낭독 녹음을 해 보면 어떤 발음을 집중적으로 연습해야 하는지 알아낼 수 있어 도움이 된다며 긍정 모드를 장착한다.


  토니는 아주 게으르다. 원서를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넘쳐나도 절대 기록하지 않는다. 이북 리더기에 연동된 영어 사전을 불러올 뿐이다. 단어를 손가락으로 클릭하는 순간 팝업 창으로 단어의 한글 뜻이 뜬다. 얼마나 편리한 기능인가. 토니는 눈으로 입으로 단어를 여러 번 익히다 보면 내 것이 될 거라며 배짱을 부린다. 영어 실력이 더디게 향상되어도, 원서 읽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며 만족해한다.


  얼떨결에 북클럽 모임을 주최하는 리더가 된 토니는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다. 리더로서 모임을 이끌기에는 가진 소양이 부족한 것 같다. 자신보다 영어나 문학에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멤버들이 많아서, 독서토론을 준비할 때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깊이 있는 토론이 되도록 준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차분하게 독서토론을 진행하는 것 같지만 초조하다. 딱 부러지게 할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 같지만, 말하고 나면 신경이 쓰인다.

  그렇다면 토니는 과연 과대 포장이 된 것인가, 아닌가. 내가 만든 이미지가 아닌 것 같은, 멤버들이 보는 그 토니는 도대체 누구인가. 분명 나이다. 내가 체감하는 토니 또한 나이다. 원서를 읽으면서 북클럽 리더를 하는 토니는 그러면 좀 당당해져도 되는 것일까. 목이 아프지만, 중얼중얼 염불을 외듯 원서를 읽고, 이북 리더기의 편리함을 잔꾀 부리듯 이용하면서라도 원서 읽기를 포기하지 않고, 자격지심을 감추고 차분한 척 토론을 이끌려고 최선을 다하는 토니가 있기에 북클럽의 리더 바로 그 토니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


  지금 생각해 보니 북클럽 리더로서 멤버들에게 보이는 토니는, 빨간 공룡과 어울려 놀던 바로 그 토니와 비슷하다. 자신감과 사명감이 넘쳤던 토니, 하던 일을 즐기던 토니, 그래서 당당했던 토니. 원서를 읽으면서 토니가 환생한 건 우연일까 필연일까. 중년의 아줌마 토니를 구원하러 빨간 공룡이 나선 것일까. 노안으로 눈이 침침한 아줌마 토니가 눈을 부릅떠가며 중얼중얼 원서를 읽는다. 거기다가 북클럽 리더를 해보겠다고 안간힘을 쓴다. 잘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는데, 멤버들이 잘한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건넨다. 내가 보지 못하는 빨간 공룡 시절 토니의 모습을 그들이 알아봐 준다. 내가 계속 원서를 읽어야 할 이유이다.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이고 관절이 아파지기 시작하는 나이에도, 내가 당당하고 즐거운 토니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원서를 읽으리라. 


  원서가 있다. 닉네임에 사연을 담고 원서를 읽는 사람들이 있다. 원서로 잠시 연결된 우리가 서로에게 응원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 응원 덕에 나는 빨간 공룡을 다시 만났다. 작은 도전과 용기가 때로는 삶의 돌파구가 된다. 원서 읽기 덕분에, 닉네임에 담은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시작이 어렵다면, 그 어려운 시작을 딛고 선 이들과 함께하기를 추천한다. 언제 어디에서라도 당신을 응원할 준비가 되어있는 북클럽 사람들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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