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검은별 Toni Nov 21. 2024

안 아프고 그만 자랄래, 아프면서 더 자랄래?

성장통

3일 전부터 심장이 쿨렁댄다. 하루에 서너 차례 쿨렁거리며 나를 놀라게 한다. 심장에 손을 가만히 얹고 괜찮다며 토닥이면 다시 진정된다. 혹독하게 치렀던 10년 전 성장통이 떠오른다. 그때 겪었던 증상 중 하나다. 도대체 또 어떤 성장통을 겪으려고 이러는 건가 싶어 허탈하면서도 웃음이 나는 건, 그간 쌓인 경험치 덕에 내 맷집이 제법 단단해졌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할지라도, 아프고 싶지 않다.

 

성장통에서 육체적 통증과 정신적 괴로움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몸이 아파서 마음도 따라 아픈 건지, 아니면 마음이 힘들어서 몸까지 탈이 나는 건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몸이 아픈 걸 먼저 느끼지만, 알고 보면 힘든 마음을 방치했기 때문에 육체적 통증으로 발현되는 경우도 있고, 이와 반대로, 풀리지 않는 마음 속 고통이 지속되면서 그 결과로 몸이 축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육체와 마음이 밀접하게 교감하며, 나 하나 지키려고 온갖 경고를 보낸다. 통증을 발사하며 좀 쉬라고 그렇게 신호를 보내는 데도 바보처럼 인지하지 못한 채, 늘 하던 대로 몸과 마음을 바쁘게 재촉하다 보면 만성 통증에 시달리게 되니 조심해야 한다.

 

성장통에도 종류가 있다.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누적되어 발생하는 일반적인 성장통이 있고, 10년마다 한 번 찾아오는 무서운 성장통이 있다. 나이가 뭐라고, 숫자 뒷자리에 동그라미 하나가 붙으면, 귀신같이 알고 그렇게 생색을 낸다. 잔치라도 여는 듯 온갖 통증을 세트로 준비해 대령한다. 잔치 음식이 아주 푸짐해서 먹다 지쳐 쓰러질 정도다. 며칠씩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나이에 ‘0’ 하나 달았을 뿐이고, 세상은 달라진 게 없고, 나 또한 ‘나’일 뿐인데, 성장통을 앓는 동안 내게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세상에서 내가 온전히 분리된다. 나마저 나에게서 떨어져 나와 둥둥 떠다닌다. 얼른 열이 떨어졌으면, 코가 뻥 뚫렸으면, 기침이 잠잠해졌으면, 머리가 맑아졌으면, 기운이 났으면, 심장이 평온해졌으면, 이명이 사라졌으면, 입맛이 돌았으면 좋겠다……. 이런 원초적인 바람만 머릿속에 꽉 찬 낯선 나를 마주하게 된다.

 

무척 아프고 외롭던 열 살,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의 나를 기억한다. 성장통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깊고 길어진다. 그에 따른 상흔도 마찬가지다. 며칠 앓다가 툭툭 털고 일어나, 감사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다시 놀러 다니던 어린 시절에 비해, 마흔 살의 성장통은 죽을 만큼 힘들었다. 그 후유증으로 여전히 나는 건강하지 못하다.

 

그렇게 아프고 나면, 세상이 좀 달라 보인다. 세상에 존재하는 비밀 하나를 알게 된 기분이랄까. 그 비밀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 뭔가 하나를 알게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면 이상한 뿌듯함마저 느껴진다. 나는 여전히 ‘나’이지만, 내가 좀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육체적인 욕구가 채워지길 열망하며 누워있는 게 전부이지만, 그 시간 내 무의식 세계에서는 나 몰래 대단한 작업이라도 펼쳐지는 것일까? 성장통에서 회복되고 나면 생각이 정화되고 나를 좀 더 알게 된 기분이 든다.

 

아프면서 자란다는 어른들의 말을 여러 번 체험했다. 아직 더 자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프고 싶지 않다. 곧 나이에 동그라미 하나를 더 달게 되었다. 그래서 심장이 쿨렁거리는 것일까? 제발 이번에는 많이 아프고 싶지는 않다. 성장통을 적당히 치르고 넘어가면 좋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마흔의 성장통이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많이 아프지는 않은데, 잔잔하게 아프다. 여기엔 타향살이가 큰 몫을 했다. 며칠 전에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미국에 살면서 내 자아를 잃은 것 같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 행동하는 내게 화가 났다. 조금 불쌍한 마음도 들었다. 착한 척, 잘 웃는 척하며, 사람들의 장단이나 맞추며 사는 나. 이 상냥한 자아가 나를 위해서도, 사람들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는 진짜 이유는, 이민자로서의 자격지심을 감추려는 비겁함 때문이 아닐까.

 

잔잔한 아픔을 멈추려면 극심한 성장통이 다시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내 자아를 다시 찾고 싶다. 당당해지고 싶다. 아… 도대체 얼마만큼 자라야 마음이 편안해질까. 자란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여기에서 성장이 멈추기보다는 계속 자라고 싶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쿨렁거리는 가슴을 토닥이며 담담하게 쉰의 성장통을 기다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인생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