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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Nov 17. 2022

불합격수기

주저앉은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오만가지 이유 중 하나

10월 29일, 지방직 7급 공무원 공채시험에 응시하였다. 이미 알고 있는 결과지만, 합격조회의 엔터키를 누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대감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나의 여정에 전환이 되어줄 마침표 하나를 찍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떨어졌다.

바람대로라면, 합격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었겠지만 한 명도 봐주지 않을지도 모를 불합격의 과정을 기록하려 한다.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아라는 가벼운 변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록 불합격으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는 못하지만, 내게는 분명히 실존했던 수험기간을 그대로 인정하고 싶었다. 떨어졌으니 너무 가혹하게 평가의 날을 들이대지도 말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위로하지도 말고. 다만, 어디쯤에 와 있는지 지도를 보며 내가 서있는 곳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다시 나의 걸음을 떼고자 할 뿐이다.   



1. 수험기간: 2022년 3월~2022년 10월 28일

수험기간은 올해 3월부터 10월말까지로 전반기에는 대학원 1학기 중으로 토익과 한국사를 준비했고, 기말고사를 마친 후반기에는 본격적인 필기시험 준비를 하였다. 과목은 모두 5개-국어, 헌법, 행정법, 행정학, 지방자치론. 10월 29일 시험까지 약5개월 못 되는 시간이 주어졌고, 초시생이나 다를 바 없는 나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이었다. 10여년 전 직렬과 직급이 다른 시험을 합격한 적이 있으나 그 사이 바뀐 표준어규정, 법령들과  처음 접하는 과목 짧은 시간이라는 제한된 상황을 반영한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수립이 중요했다. 공시생 공부법, 단기합격 비법 등 웬만한 정보는 다 찾아본 것 같다. 차고 넘치는 공부법 같지만, 귀결점은 하나-기출 중심. 가만히 돌이켜보니 10여 년 전의 나는 직장을 다니며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어 기본서는 거의 보지 않고, 답지와 기출문제만 봤었다. 임용된 뒤에 동료들의 수험생 시절 이야기를 듣고 내가 너무 대충 공부했는가 하는 반성을 하기도 했던 공부법이었는데, 단기 합격생들의 공통된 공부법이라 소개되는 것을 보며 이상한 홀가분함을 느끼게 했다. 나름 운빨로 되었나 하는 불안한 생각이 구석 어딘가에 있었나 보다.


4월 30일까지 식당을 운영하며 전공수업과 토익공부를 병행했다. 전공과목의 기초가 되는 '경제학원론'도 같이 공부했다. 이렇게 나열해보면 각기 상관없는 공부들 같지만, 학과 교수님이 선정하는 교재가 주로 영어 원서이고 대학원 졸업자격요건 외국어 능력시험 점수가 있어 십 년 간 영어를 손 놓은 내가 학업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수험과목 중 경제필수적인 내용들을 압축적으로 다루고 있어 국가직 응시 여부와 상관없이 기본강의를 모두 수강하였다. 덕분에 타과 전공자인 내가 경제학이라는 전체 그림을 볼 수 있어 학과 수업을 수강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공부에 도움되는 것과 별개로 합격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선택하지는 않았다. 이동하는 차 안,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토익 LC를 내내 들었다. 놀랍겠지만, 나는 40에 이르는 동안 토익을 한 번도 응시해본 적이 없다. 운 좋게 내가 속한 학번까지 영어능력이 졸업자격요건이 아니었고, 이후 직장들은 공인 영어시험이 필요하지 않았다. 난생처음 접한 토익은 하아- 내게 모욕감을 주었다. 3번째 응시만에 겨우 700점을 넘겼고, 대학원에 외국어 시험 면제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사이버 지자체 원서접수센터에 점수를 등록했다. 한국사는 다행히 한 번만에 1급을 받았고, 기말고사를 마치고 곧장 수험공부에 돌입하였다.


2. 과목별 공부: 인강(기본서, 요약강의, 모의고사), 기출문제집, 단권화

처음 접하는 과목이면서 강의 분량이 가장 많은 헌법을 첫 번째로 배치했고, 행정학, 행정법 순서대로 기본강의를 들었다. 기본강의를 모두 수강하는 데에 약 40일쯤 걸렸다. 처음 듣는 내용이라 평균 1.5배속으로 강의를 들었고, 국어는 강의를 듣지 않았고 지방자치론은 시험을 앞둔 약 한 달 전에 이틀에 걸쳐 한꺼번에 기본 강의를 수강하였다. 기본강의를 모두 들은 뒤에는 기출문제집을 풀며 다시 기본서를 회독하였다. 총 회독수는 3회였다. 5개월 남짓의 짧은 시간과 공부 시간이 짧아 합격자들이 말하는 회독수보다 많이 모자랐다.  평균 순공 시간은 하루 10시간, 주 6일이었고 2학기 개강 후에 학교 수업이 있는 날은 5시간 정도 했다. 학교를 가지 않은 여름 방학기간에는 아이도 방학이라 개강시기와 시간 확보에 있어 특별한 차이점을 갖기 어려웠다. 체력과 집중력이 10시간을 넘어가면 현저히 떨어져 수험 초기에는 일 평균 순공 시간을 12시간을 잡기도 했지만, 시험 마지막까지 완주할 수 있는 순공 시간을 정해 지켜나갔다.


3. 통제 불가능한 변수들

육아, 살림, 학생이라는 조건은 계획을 실행하는 제약조건이기도 했지만 몰입감을 높여주는 동기부여가 되기기도 하였다. 2학기 개강 후에는 남편이 육아와 살림을 전담하면서 학과 수업과 수험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휴학고민하기도 했지만 입학하자마자 코로나로 2년 간 미루다 이제야 복학한 터라 곧장 휴학하면 공부 일정이 너무 늘어져 졸업은 요원해질 것 같았다. 일단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내려오지 않고 버텨가는 쪽을 택했다. 대신 과목수를 줄여 시간에 대한 부담을 줄였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학기에 개설된 과목 중 하나가 큰 부담없어 가능한 결정이기도 했다.

시험 약 보름 앞에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지만, 아이가 확진되니 피하기가 어려웠다. 끙끙 앓으며 문제를 푸는 순간에는 합격한 후에 추억이 될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2주 앞에 있던 국가직 7급 필기시험이 공개된 날에는 비몽사몽 한 정신에 누워서 해설강의를 듣다가 불안한 마음에 꾸역꾸역 책상 앞에 앉아 문제를 풀었다. 격리기간이 시험일정을 비껴가서 그저 감사했을 뿐이다.


4. 패인 분석

개인적인 패인을 살펴보기 전,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면 영어와 한국사가 공인시험으로 대체하여 상대적으로 7급 시험을 준비하기 수월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합격선은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이다. 노력이야 다들 차고 넘니, 당락을 가르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당일에 얼마나 평소의 실력을 펼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공무원 공채 정에 가장 마지막에 배치된 지방직 7급은 1년의 시험일정들을 통해 더욱 단련된 수험생들이 응시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번에 내가 응시한 지역은 내가 속한 소도시보다 약 8점 정도 높은 합격선이었다. 제 아무리 예측 불가능한 문제가 튀어나오고 난도가 높아도 서열은 정해지고, 합격자가 있다. 합격권에는 들어갈 실력이 되고 볼 일이다.


이제 나를 살펴보자. 나는 단언컨대 단 하나의 실수도 없었다. 시간 배분, 문제풀이 방식, 마킹 순서 시험의 기술적 측면에서는 수정할 사항이 없다. 그럼 왜 떨어졌을까? 명확히 내 실력이 부족했다. 공부가 부족했다. 시험을 풀면서 스스로 판단해 풀었고 거의 찍지 않았다. 틀렸다면 나의 공부가 잘못되었거나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국어는 인강을 듣지 않았고, 기출문제집과 모의고사 문제집을 풀었는데 역시나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국어가 나의 발목을 제대로 잡았다. 헌법과 지방자치론은 적정 수준이었고, 행정법과 행정학은 아쉬웠다.


 



시험장을 나설 때, 정말이지 홀가분했다. 채점을 하기 전까지는...

채점 결과를 가족들에게 알릴 때에는 오늘 내가 이 글을 쓰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짧은 수험기간에 비해 과한 반응인 것 같지만, 나로서는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임한 시험이라 온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은 절망감이 온몸을 덮쳤다. 아마도 몇 년 간의 도전들이 실패로 끝나 조급함이 나를 집어삼켰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건들을 향한 아무 소용없는 후회가 습관처럼 떠오르고, 내게는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극한까지의 생각들이 나를 몰아붙였다. 과도한 반응이다. 나도 안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만의 살아온 시간의 무게가 있으니 사건의 파동에도 각자의 크기가 있다. 수험생활 동안 과한 목표로 가족들의 귀한 자원과 시간을 뺏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시대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대로 떠돌다마는 것은 아닌지라는 두려움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혔다.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러게 왜 공무원은 그만둬서라는 말을 들을 때면 스스로를 의심하고 탓하게 되기도 했다. 분명 내가 선택하고 내가 계획한 대로 나아가고 있지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것일지도 모른다는 자기 의심이 들 때면 돌이키지도 못하는 시간과 결정들을 후회하게 되었다.

일주일 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 그래도 학교 수업은 빠지지 않았다. 이것이 아마 20년 전의 나와는 가장 다른 점이다. 깜깜한 혼자만의 방에 스스로를 가둬두더라도 약간의 틈은 열어두는 것. 이 틈으로 숨을 쉬고 빛을 받으면 언젠가는 창문을 열어젖히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가족이 있었다. 굳이 혈연 아니어도 그 틈 밖에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 누군가의 인기척이 다시 문을 열 수 있게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떤 사건이나 상황을 경험하면 나는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단절시켰다. 사람들 속에 있으며 홀로 있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실제로 모든 관계를 피하기도 했다. 내 마음의 문이 오직 안으로만 손잡이가 달려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누구 때문에 마음이 닫혀 열리지 않다고 여기며 살았다. 남편 때문에, 시댁 때문에, 어린 시절 상처 때문에, 이십 대의 기억들 때문에 그 밖의 때문에... 여러 때문에들이 최초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사과를 받으면 문이 열리는 줄 알았지만 나는 열지 않기도 했고, 때로 어떤 사과들은 되려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굳어가는 것이었다. 그간의 경험과 생각들이 새로운 사건임에도 나이만큼 쌓인 패턴대로 작동하며 대응한다. 단지 시험에 떨어진 것 하나의 사실이 기폭제가 되어 쾅! 굉음을 내며 나를 가두었다.

일주일 간 남편은 온 신경을 곤두세워 나를 살폈다.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 애쓰는 모습에 그 날들 중 어느 날에 "그러지 마. 그냥 나를 없는 사람처럼 대해줘"라는 부탁을 했고, 남편은 그 말에 겁이 덜컥 났다고 한다. 참 나쁜 나다. 그렇게 일주일을 남편은 닫힌 마음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아무런 의도 없이 그저 나를 기다려주는 한 사람. 작은 틈.

며칠 뒤, 가족들에게 나의 진로에 관해 의논하자고 하였다.


수험생활은 혼자만의 고생이 아니다. 나를 떠받치는 손길이 없다면 불가능했다. 남편은 시간을 제대로 들여 한 번 더 해볼 것을 제안했고, 아이는 엄마와 대화가 줄고 가족여행을 다니지 못해 아쉽다며 그만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근데, 엄마 결정은 뭐야? 어떻게 할 건데?" 아이 핑계를 대며 슬쩍 도망치려 했는데, 그럴 수는 없게 되었다.


엄마도 한번 더 해볼게. 또 실패할까 봐 두려운데,
너랑 아빠가 함께 하니깐 또 해볼게.



이렇게 쓰고 보니 우리 부부 사이가 엄청 대단해 보인다. 우리는 길가다 휴대폰을 던지며 싸운 적도 있고, 이혼 서류를 접수하러 법원 입구까지 가기도 하고, 시집과의 갈등에서 친정과의 갈등까지 겪지 않은 것이 없다. 서로의 밑바닥을 있는 대로 경험한 16년 차 부부. 대단할 것 없어도 약한 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향한 작은 빛이 될 수 있었다. 그 빛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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