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까이 있는 것들
추억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말없이 무게를 더해, 우리가 흔들릴 때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신입사원 시절, 나는 아스팔트 운송비 정산 업무를 맡고 있었다. 업체별 운송량과 거리, 단가를 확인해 비용을 결제하는 일이었다. 반복적인 숫자 작업이었지만, 서류 하나가 어긋나면 전체 일정이 지연되는 만큼 절차에는 늘 변수가 따랐다.
어느 날 한 협력업체에서 부가가치세 계산서를 누락했다는 연락이 왔다. 담당 여직원은 평일에 시간을 내기 어렵다며 토요일에 직접 서류를 전달하겠다고 했다. 약속 장소로 제안한 곳은 한강 유람선 선착장이었다. 주말에 업무로 사람을 만나는 것도 부담이었고, 장소 또한 일과 어울리지 않아 망설여졌지만, 막내 사원으로서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약속을 받아들였다.
나는 서류만 건네받고 바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람선을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다며, 잠깐만 함께 타보자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의미 있는 사람과 처음 타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그 ‘처음’을 이렇게 써버리는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이미 기대를 드러낸 사람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유람선에 올랐다. 창밖으로 흐르던 강물과 낯선 풍경, 어색한 침묵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다. 특별할 수도 있었던 경험은 그렇게 뜻밖의 상황에서 지나갔다. 그날의 기억은 즐겁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채 ‘조금은 아까운 첫 경험’으로 마음 한편에 남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그 경험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신중하지 못했던 선택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을 누구와 나누느냐에 따라, 같은 경험도 전혀 다른 무게로 남는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배웠다.
최근 집사람의 친구 아들을 보며 오래전 그 유람선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는 운동만 해오다 프로 입단에 실패했고, 이후 뚜렷한 진로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여자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결국 동거를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다음 달에는 그녀와 함께 유럽여행을 떠날 계획이라는 말도 전해 들었다.
젊음의 선택을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그 만남이 그의 인생을 바꾸는 소중한 인연이 될 수도 있다. 다만 마음 한켠에서는 걱정이 앞섰다. 만약 그 관계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면, 그의 첫 유럽여행이라는 큰 경험이 너무 가볍게 소비되는 것은 아닐지 염려되었다. 인생에서 처음이라는 경험은 대체로 다시 오지 않기에, 그만큼 신중히 다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로마 시대 철학자 세네카는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에서 삶에서 가장 귀한 소유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시간으로 만들어지는 추억은 아무에게나, 아무 마음으로나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그 시간에 담긴 기억은 결국 한 사람의 삶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경험이 많을수록 삶이 풍부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삶을 지탱해 준 것은 수많은 사건이 아니라 몇 개의 단단한 기억이었다. 힘들 때 떠올릴 수 있는 얼굴, 마음을 다해 보냈던 시간, 쉽게 결정하지 않았기에 오래 남은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붙잡아 주었다.
요즘은 관계도 경험도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다. 만남은 가볍고, 이별은 익숙하다. 새로운 경험은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오래 남는 기억은 드물다. 깊이 고민하지 않은 선택은 순간을 채울 수는 있어도, 시간이 지난 뒤 삶을 지탱해 주지는 못한다.
반대로 오래 남는 추억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구와 함께할지, 어떤 마음으로 시작할지, 그 순간을 얼마나 소중히 대하는지에 따라 기억의 무게는 달라진다. 중요한 경험일수록 한 번쯤 더 생각하고, 서두르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은 화려한 사건이 아니다. 신중하게 쌓아 올린 추억의 무게다. 누군가와 함께한 순간, 마음을 들인 시간, 쉽게 선택하지 않았던 경험들은 시간이 지나도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준다. 가볍게 흘려보낸 경험은 사라지지만, 신중히 쌓은 기억은 삶의 중심이 되어 남는다.
그래서 중요한 순간일수록 우리는 추억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을 지탱할 자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