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일상] 이거 한번 잡숴봐
그리스는 유독, 세상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는 음식, ‘피자’가 크게 존재감이 없는 나라이다. 비단 피자뿐만이 아니라, 버거, 스시, 타코, 카레, 프라이드 치킨, 라멘 등의 글로벌 강자들은 그리스에서 맥을 못 춘다. 그리스는 외식거리도 그리스 향토음식으로 넘쳐난다. 그리스인의 길거리 소울 푸드는 Γύρος (Gyros; 기로스)와 Σουβλάκι (Souvlaki; 수블라키) 이며, 가장 즐기는 빵집 아이템은 그리스식 시금치파이인 Σπανακόπιτα (Spanakopita ; 스파나코피타)이다.
식당에서 파스타를 시켜도, 보통 ‘그리스식 스파게티’를 접하게 될 것이다. 전반적인 특징으로 그리스식 파스타는 토마토소스에 시나몬, 넛맥, 파프리카 등의 향신료가 들어가서 맛이 좀 더 강렬하고 입체적이다. 돌돌 말아 예쁘게 플레이팅 해주는 이탈리아와 달리, 그리스에서는 커다란 접시에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푸짐한 양을 담아준다.
그리스에서는 그리스 스타일의 향토적인 식당인 Ταβέρνα (Taverna; 타베르나)가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다. 글로벌 프랜차이즈나, 세계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에 물들지 않고, 그리스만의 고유한 식문화와 먹거리를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 코르푸 섬에 오면, 그리스 본토 음식과 미묘하게 또 다른 모습이다. 그리스 음식인 듯 아닌 듯, 이탈리아 음식인 듯 아닌 듯, 전반적으로 오묘하게 헷갈리는 음식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코르푸는 그리스 본토와 달리,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무려 400년간 베네치아 공화국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반적인 문화는 물론, 그리스 전통 음식과 이탈리아 음식의 크로스오버가 많이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적, 사회적 흐름으로 보면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코르푸 인들은 양쪽 문화를 흡수하여 재창조하고, 오랜 세월 동안 숙성시키며 그들만의 식생활 문화를 정착시켜왔다. 그래서 더 특별하고, 더 독특하다.
이오니아해의 푸른 섬, 코르푸의 전통 음식 중,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으로, 가장 전형적인 요리 네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째, ‘Παστιτσάδα (Pastitsada; 파스티차다)’가 있다. 삶아서 갓 나온 뽀얀 스파게티 면 위에 푸짐한 고기 스튜가 소스로 얹어져 있다. 스튜는 소고기 혹은 닭고기(암탉보다는 육질이 질긴 수탉)에 토마토, 레드와인 및 시나몬, 넛맥, 클로브, 파프리카 등의 여러 향신료 믹스로 맛을 낸 소스를 졸여 만든다. 그 위에 치즈를 갈아 솔솔 올린다.
고기 스튜를 스파게티에 얹어주니 한 접시 양이 후하다. 고기도 먹고 싶고, 파스타도 먹고 싶을 딱이다. 나처럼 메뉴 선택에 결정 장애가 있는 사람은 고마울 따름이다. 마치 짬뽕 반, 짜장면 반 나오는 짬짜면 시킬 때와 같은 은근한 만족감을 준다.
Μπουρδέτο (Bourdeto; 부르데토)는 매콤한 맛의 생선 조림 요리이다. 베네치아식 'Brodeto' 에서 유래되었고, 지금은 코르푸에서 가장 널리 먹는 생선 요리라고 한다. 생선에 양파와 토마토소스, 칠리 파우더 등의 스파이시한 향신료가 조화를 이룬다. 생선의 오일이 베어나와 소스에서 분리될 때까지 젓지 말고 뭉근히 졸인다. 감자를 추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무리는 역시, 코르푸식 요리의 화룡정점인 레몬쥬스를 쭉 뿌려준다. 주로 Scorpionfish로 알려진 쏨뱅이목이 사용된다.
빨간 비쥬얼이나 매콤달콤한 감칠맛이 왠지 친숙하게 느껴진다. 우리에게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맛이다. 나중에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 얼큰한 맛이 땡길 때, 나의 든든한 소울푸드가 될 듯하다. 여기에 고추장과 청양고추를 가미하여 코르푸-한국식 퓨전을 만들면, 아, 소주를 부르는 맛이 될 듯하다.
세 번째로, ‘Σοφρίτο (Sofrito; 소프리토)’는 소고기 혹은 송아지 고기를 마늘과 와인을 넣은 소스에 넣고 졸여낸 음식이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이웃 나라 스페인, 포르투갈 및 라틴 아메리카에도 동일한 명의 비슷한 요리가 존재하는데, 그리스에서는 보통 코르푸 지역 음식으로 통하여 ‘코르푸 소프리토’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프리토는 특히 우리 시어머님 스페셜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입에 넣으면 마늘 풍미가 가득한 부드러운 와인 소스 안에서 고기가 살살 녹는다.
요리 방법도 간단하다. 우리나라 돈가스 두께의 소고기에 밀가루를 입히고 바삭하게 구워준다. 올리브유에 다진 마늘을 넣고 볶아 마늘 기름을 내어준 후 식초와 와인을 부어주고 살짝 끓인다. 미리 구워 둔 소고기에 붓는다. 물과 소금, 후추, 허브 등을 넣고 끓인다. 낮은 불에 천천히, 소스에 육즙이 배어 나오고 고기는 부드러워지도록 뭉근하게 졸인다. 파슬리를 찹찹 올리고 감자 혹은 얇은 파스타면과 함께 낸다. 코르푸의 가장 대표적인 가정식이다.
마지막으로, ‘Μπιάνκο (Bianco;비앙코)'는 코르푸 사람들의 전형적인 생선 요리 방법을 보여준다. ’비앙코‘는 마늘과 레몬 향의 소스에 생선과 감자가 어우러진 요리이다. 얼핏 보면 희멀건한 생선 수프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생선과 감자 위에 적당한 묽기의 소스가 어우러져 납작한 접시에 서빙된다. 화이트 와인과 페어링 하기에 이상적이다. 생선은 기름 진 종류가 어울리며, 우리가 아는 종류로는 대구(Cod fish)를 사용한다.
'비앙코(Bianco)’라는 명칭 자체는 ‘하얀색’이라는 이탈리아어에서 왔지만, 요리에서는 그리스 특유의 심플함과 조화로움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 양파, 마늘, 올리브 오일, 레몬주스, 생선 슬라이스, 감자에 물을 약간 붓고 신선한 허브와 소금, 후추 간만으로 끓이고 졸이기만 하면 된다. 조리법이 거의 3분 요리 수준이다.
이들만 살펴봐도 대략적인 코르푸 음식의 특성이 보인다. 올리브유, 레몬, 허브, 와인, 생선 등 그리스 특유의 신선한 로컬 식재료와 이탈리아식 레시피가 만나고, 마늘과 다양한 향신료 등이 더해져 더욱 깊게, 강렬하게 그리고 풍부하게 풍미가 살아있다. 그러면서도 심플함이 살아있다. 레드 소스 아니면 화이트소스이다. 생선 아니면 육류이다. 삶거나 졸이거나이다. 그리고, 식재료 간의 조화로움이 살아있다.
대부분의 그리스 요리가 그렇듯, 요리사의 기교보다 신선한 재료들의 조화가 역할을 다한다. 코르푸에 오면 그리스 전역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수블라키(Souvlaki)나 기로스(Gyros)도 좋지만, ‘코르푸 전통 요리‘를 꼭 먹어보자. 이 섬을 나가면 아무도 요리해 주지 않는 특별하고, 독특한 음식들이다.
May 2024, Daej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