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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Mar 28. 2024

운수 오지게 나쁜 날

"열차 내가 매우 혼잡하니 무리하게 승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출근시간, DMC 공항철도역은 평소보다 많이 붐볐다. 오늘 서울 버스 노조파업으로 버스 운행이 중단되다 보니 지하철로 몰린 탓이다. 설상가상 추적추적 비까지 내렸는데, 비 오는 날은 사람들이 왠지 버스보다는 지하철 타는 것을 선호하다 보니 더 혼잡해진 것 같았다. 


나는 DMC역 대합실 천장을 올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카드를 찍고 들어가면 그 한가운데에 천창이 있기 때문에 아침에는 햇빛이 역사 안으로 떨어져 들어온다. 겹겹이 배치된 벽들 때문에 난반사가 일어나면서 더 화사해지는데, 오늘은 비가 내리면서 더 어둑어둑하고 꿉꿉한 느낌이 들었다.  


서울역 방면 플랫폼에 자리를 잡고 보니 내 앞에는 대략 12명 정도의 사람들이 양갈래로 줄지어 서 있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는 여유 있게 탈 수 있는 인원수라서 걱정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 공항철도는 배차간격이 길어서, 마지막에 딱 걸려서 못 타기라도 한다면 출근시간 맞추기가 간당간당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내 옆으로 이제 갓 여대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수업에 가는 길인지 아이패드를 팔에 끼고 있었는데, 어디서부터 뛰어온 건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자동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하는데, 아뿔싸 생각보다 내리는 사람이 적었다. 12명 이상이 들어가기는 부족한 공간이다. 우리가 탈 때쯤 공간이 거의 남지 않았다. 나와 그 여대생은 필사적으로 공간을 확보하려고 애썼다. 앞으로 밀다가 몸을 돌려 밀고 이리저리 발버둥 치다 보니 겨우 우리 두 사람까지는 들어갈 공간이 확보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쪽으로 몸을 돌려보니, 아.. 플랫폼 쪽 자동문 밖에 애플팬슬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필시 이 여학생이 떨어뜨린 것 같은데, 아직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나는 잠깐 주춤하다가 얼른 팬슬을 주워줘야겠다 싶어서 살짝 그 자리에 앉아서 팔을 문밖으로 뻤었다. 그런데 아뿔싸. 갑자기 문이 닫히면서 내 엉덩이가 지하철문에 끼었고 내 팔은 앞에 있는 자동문에 끼어 버렸다. 사실 문이 금방 다시 열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상당히 강한 압력으로 몸을 짓누르는 바람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문이 다시 열리자마자 얼른 일어섰고, 팬슬을 줍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 광경을 보고 다가와서는 애플팬슬을 주웠다. 팬슬을 건네주려는 찰나, 그때 다시 문이 닫히기 시작했고 여학생도 그제야 상황을 인식했다. 그분은 팬슬을 전달하려고 우리 쪽으로 손을 더 뻗었지만 자동문에 끼일 듯했고, 어쩔 수 없이 손을 뺄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지하철 문은 속절없이 먼저 닫혀버렸고 여학생은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구르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분은 머쓱해하며 그 자리에 팬슬을 두고 떠나셨다. 


여학생은 헐떡이는 건지 울먹이는 건지 구분하기 힘든 소리를 내며 핸드폰으로 DMC 역 관제실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저기요.. DMC 역 타는 곳에서요.. 제가 애플팬슬을 떨어뜨렸는데요.. 문이 닫혀버려서요.. 가셔서 제 애플팬슬 좀 찾아주시면 안 될까요..."


홍대입구를 거쳐서 공덕까지 가는 8분여 시간 동안 그녀는 속삭이듯 울먹이며 계속 통화를 했다. 


그녀는 분명 어딘가에 많이 늦었고, 아침부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는 흠뻑 젖어 있었는데, 머리를 감고 시간이 없어서 미처 못 말리고 나온 건지, 비에 젖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오늘 아침에 오지도 않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중요한 일에 늦어버렸고, 비를 맞으면서 지하철 역까지 뛰어 왔는지도 모르겠다. 설상가상으로 팬슬까지 잃어버렸으니 불행이 겹쳐버린 것이다. 


바로 옆자리에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 안쓰러웠다.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이 서있는 한가운데서 다 들릴 수밖에 없도록 통화를 하는 것이 얼마나 고역일까. 저렇게 움츠린 채로 울먹이면서 전화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원망스러웠다. 그녀는 그렇게 완전히 노출된 채로 그 시간을 견뎌야 했다.

 

미안했다. 사실 좀 위험해도 내가 한 번만 더 문에 끼였다면 문이 다시 열렸을 테고, 팬슬은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내가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그녀의 물건이 아니라 내 물건이 떨어진 것처럼 반응했더라면 어땠을까?

기회가 있었더라도 그녀는 그 문을 막어서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나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내가 그녀를 위해서 조금만 더 용기를 내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녀가 홍대입구역까지 가는 동안 힘든 숨을 내쉬었겠지만, 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녀가 공덕역까지 가는 동안 부탁하는 말로 부끄러워지는 대신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따뜻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운수가 오지게 나쁜 오늘,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공덕역에서 그녀는 내리자마자 뛰어갔다. 

저 멀리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그녀의 남은 하루에 행운을 빌었다. 


꼭 제 시간 안에 도착하길

오늘 하루 더 이상 곤란한 상황에 처하지 않길

오늘하루 더 이상 서럽게 흐느끼질 않길

돌아가는 길에 애플 팬슬을 꼭 되찾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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