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핀란드.
이 “구분하기 힘든 나라들의 집합체”를 유럽인들은 ‘스칸디나비아’라는 반도 이름으로 묶는다.
우리는 ‘북유럽’이라는 단위로 묶는다. 민족적 언어적으로 동질성이 높은 나라들이다.
단 핀란드는 제외해야 한다. 바이킹 후손도 아니고 언어도 다르다. 그럼에도 핀란드를 빼는 일은 거의 없다. 가까이 붙어 있다는 것 외에도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중세기 동안 봉건제를 거치지 않았고
기독교가 늦게 전파된 지역이라는 점이 있고, 현대 국가로 넘어오면서 공통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공유하고 고도로 발달된 복지국가라는 점도 있다.
5개국 모두 공통적으로 대단히 성공적인 복지국가들이다. 자유, 안정, 평등, 신뢰, 이웃, 환경 등
여섯 키워드로 만족도를 조사해서 평가하는 ‘행복지수’라는 것이 있는데,
북유럽 국가들은 항상 톱 그룹에 속한다. 1, 2위는 그들 사이에서 주고받는다.
2016년 조사에서 1위를 한 덴마크는 인구의 2/3가 삶에 만족하며 80%가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2023년에는 핀란드가 1위, 덴마크가 2위였다. 부럽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복지국가란 무엇인가? 국민 각 개인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위험을 국가가 떠 안아 해결해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국가를 말한다. 일자리, 주거, 교육, 의료 등을
국가에서 알아서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냥 되는 일이 아니다.
돌려받겠지만 우선 부담을 잘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국가가 잘 쓰겠다고 강제로 걷어가는 세금을 국민들이 저항하지 않고 잘 내야 한다.
세금을 내면서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데 북유럽 사람들은 그런 것 같다.
인터뷰에서 세금에 대해서 물어보면 대답한다. “세금을 줄이는 것에 반대한다. 더 낼 수 있다.”
세금이 적으니까 그렇겠지. 아니다. 세계 최고의 세율이다. 소득세 기본세율이 42∼56%다.
버는 돈의 절반을 떼어간다. 말이 되는 일인가?
주택을 가지고 있으면 보유세가 있다. 물건에 붙은 부가가치세는 30%다.
그래서 유럽 평균보다 물가가 약 40% 비싸다. 동유럽 물가의 2배다.
자동차 가격도 다른 유럽 국가의 2배에 가깝다. “살인적” 물가 속에 살면서도 세금에 불만이 없다.
덴마크 사람들은 유난히 세금을 좋아한다. 국민 80%가 세금을 내는 데 만족한다.
“세금을 더 내고 싶다.” 어떤 덴마크 시민이 외국 방송과 인터뷰하면서 말하는 것을 프랑스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귀가 의심스럽다. 대체 이 사람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
북유럽 사람은 자신의 정부를 신뢰한다. 자신들을 위해 일한다는 확신이 있다.
정부 부패 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낮다.
공무원들, 특히 고위 공무원들의 검소하고 청렴한 생활은 레전드 급이다.
스웨덴의 경우를 보자. 장관은 집에서 걸어서 출근한다. 집도 주지 않고 경호원도 없다.
팔머 총리와 외교부 장관이 시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다가 살해당한 이후 장관 22명에게
출퇴근 자동차를 제공한다. 부처 청사는 별도의 전용 건물이 아니라 시내 흩어져 있다.
슈퍼마켓이나 선물가게 위층에도 있다. 사무실은 별로 크지도 않고 꾸며 놓지도 않았다.
작은 TV, 일반 가정 것과 같은 소파 세트가 있고, 사무용 책상과 의자도 비싸지 않은 것이다.
이케아 가구를 생각하면 된다. 커피나 복사도 장관 자신이 해결한다.
점심식사는 전용 식당에서 하는데, 식사비는 7유로 정도다. 관련 업무로 외부 손님을 초대한 경우에는
식사비가 면제된다. 개인용 휴대전화는 자신이 요금을 내서 따로 쓴다.
외국 출장 항공권은 이코노미석이고 비행시간이 3시간 이상인 경우에 한해서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해 준다. 호텔은 중간 등급이다. 공금 사용은 엄격히 제한된다.
최소단위까지 정산해서 시민이 언제든 볼 수 있게 되어 공개되어 있고 수시로 감사를 받는다.
여성 부총리 한 사람이 해외 출장 중에 법인카드로 현금 200유로, 즉 한화 약 30만 원을 인출한 것이
언론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 돈으로 일회용 속옷과 초콜릿을 샀다고 기자회견을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촉망받았던 사민당 소속 여성 정치인이었는데, 활동을 재개하는 데
15년의 자숙 기간을 거쳐야 했다.
“고위직 공무원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위험하다.”
노르웨이 내무부 장관은 말한다. 특권이란 탈선을 할 수 있는 위험한 것이며
장관도 정상적인 일반인의 생활을 해야 적절한 정책을 수립 시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특권도 없다.
자동차, 주택, 경호원 등 권한의 사용을 감시받고 통제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지 알아? 이런 종류의 특권을 갖고 싶은 사람은 허망하다.
고위 공무원을 이 정도까지 홀대하는 사회적 합의는 어떻게 가능할까? 봉사 정신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거의 체질화된 평등 의식이 있어야 한다.
세상은 평등한가? 평등하지 않은가? 세상은 평등하고 동시에 평등하지 않다.
권리, 의무, 존엄성 측면에서는 평등하다. 그러나 역량과 능력에서는 불평등하다.
대부분 사회는 평등보다는 불평등 영역에 관심을 더 쏟는다. 우수한 몇 사람의 능력이
공동체의 생산성과 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개인의 능력을 계량하고
상위 등급을 골라 보상하고 격려한다. 그리고 상위 등급을 제외한 나머지는 버리고 간다.
하나 가지면 열 개를 갖고, 하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영영 갖지 못한다. 경쟁 때문에 불평등은 더욱 심해진다.
북유럽 사회는 이와 정반대다. 엘리트주의를 배격한다. 불평등을 최대한 진정시키고
평등의 영역으로 편입시킨다. 예컨대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지 않는다.
공부를 잘한다고 공개적으로 칭찬하거나 보상하는 일은 없다. 대학에 서열이 없으므로
그 이하 초등, 중등에도 서열이 없다. 그러므로 비교 우위를 위해서 필사적으로 매달리지 않는다.
교육에서 평등주의는 저항에 부딪힌다. 경쟁이 없으면 학력은 낮아질 수밖에 없으며
사회의 능력을 떨어트리고 국가가 경쟁력을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역동성에서 북유럽 국가들의 존재감은 작지 않다.
노르웨이에는 뉴트로지나 로션이 있고 연어가 있다.
국민소득 7만 달러, 우리가 가까스로 도달한 연 소득의 2배다. 물론 북해에 막대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스웨덴에는 이케아 가구, H&M 기성복, 볼보 자동차가 있다.
한 때 세계 팝송 세계를 휩쓸었던 그룹 아바가 활동했던 음악 산업은 미국 영국 다음 3위다.
‘근거리 무선기’ 이름이 바이킹의 왕 이름 ‘블루투스’인 것은 스웨덴 통신 장비업체 덕분이다.
낙농의 나라 덴마크에는 레고 장난감과 방 앤 올슨 스피커가 있다.
경제 외 분야에도 별로 빠지지 않는다. 매년 전 세계가 주목하는 ‘노벨상’이 있고,
『인형의 집』을 쓴 작가 입센이 있고, ‘비명’을 지르는 화가 뭉크가 있고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이 있다.
스웨덴 탐험가 아문센이 있고 학명을 만들어낸 린네가 있다. 노르웨이인 난센도 있다.
덴마크에는 안데르센의 동화가 있고 키르케고르의 철학이 있다.
다섯 나라 인구를 모두 합해도 3천 만도 안 되면서 한 일이 많다.
‘인간개발지수’는 정말 결정적이다. 2022년 통계에서도 북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톱 그룹이다.
1위가 또 노르웨이다. 맙소사. 어쩌란 말인가? 자기 계발은 고행의 열매라고 생각하는 우리로서는
너무 어이없는 일이다.
사실 따져보면 학습은 시간의 문제다. 문제를 풀고 외우는 시간이 빠를수록 우수하다고 칭찬하고
높은 등급을 준다. 그렇지만 시간을 주고 기다려 주면 모든 아이들이 문제를 풀고 외울 수 있다.
교육의 목표란 결국 그것이 아닌가? 기다려주는 미덕이 있으면 몇 명만 상위 등급으로 올리고
나머지 대부분을 하위 등급으로 밀어버려 용기를 꺾지 않아도 된다. 북유럽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우리도 기다려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