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입장
미국을 경계하라는 이 섬뜩한 경고는 누가 한 것일까? 놀랍게도 미국 전 국가안보보좌관이자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였다. 최근 프랑스 정치 군사 전문가들이 자주 인용하고 있는 이 발언은 매우 난처한 주문이다. 적도 친구도 되지 말라는 슬기로운 처신은 바람직한 조언 같지만, 세계 최강 국가와 도대체 어떻게?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너무 어려운 일이 아닌가? 미국과 하나로 묶여 ‘집단서양(Occident collectif)’이라고 불리는 유럽은 어떤 입장일까?
프랑스 전 대통령 드골은 미국을 경계했다. 미국은 프랑스를 되찾기 위해 런던에서 투쟁하고 있던 ‘자유 프랑스’를 무시했다. “전쟁을 히틀러와 했는지 루스벨트와 했는지 모르겠다.” 후일 드골이 남긴 말이다. 프랑스인 ‘라파예트’는 미국 독립전쟁을 돕기 위해 미국에 갔건만, 그들은 프랑스를 해방시키러 온 것인지 점령하러 온 것인지… 마샬 플랜 원조를 대가로 영화시장의 개방을 요구했을 때 드골은 경악했다. 미국을 관찰하던 그는 주둔하고 있던 미군 기지를 철수하게 했다.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했다. 국제 외교에서 독자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2007년 사르코지 대통령 당선 이후부터 서서히 바뀌었다. 마크롱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극적으로 달라졌다. 미국을 동경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고 사립학교를 졸업해 금융계에서 일하며 ‘프랑스-미국친선협회’를 드나들었던 그는 ‘미국인 마크롱’으로 불릴 정도로 미국과 가깝다. 일부 프랑스인들의 생각이다.
이제 유럽에서 미국에 큰 소리를 내는 지도자는 없다. 유럽의 외교는 미국의 외교와 싱크로율 100%다. 경제 제재를 하든 외국 내정에 개입하든 미국이 결정하면 대체로 토를 달지 않고 따라간다. “유럽은 없다. 미국이라는 제국이 있고, 유럽은 그 휘하에 도열하고 있는 가신들이다.” “유럽연합은 아메리카제국을 위해서 존재한다.” 학자들이 야유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쳐들어 왔을 때 유럽은 패닉에 빠졌다. 전쟁? 거의 1세기 만에 일어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태였다. 방어체계를 점검한 유럽은 다시 한번 패닉에 빠졌다. 군사 동맹 NATO의 지휘권을 대서양 건너 7천㎞ 떨어진 미국이 가지고 있으니 독자적 전략을 세울 수 없었다. 미국이 개발하는 무기를 사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보호 아래 지내는 동안 무기를 생산할 인적 기술적 능력을 완전히 잃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 영국 독일, 유럽 메이저 3국은 각기 탱크 200여 대, 전투기 200여 대, 전함 10여 기 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세 나라 탱크를 모두 합해도 한국 육군이 보유한 탱크 수 2,872대보다 훨씬 적었다.
미국이 씌워준 핵우산은 독이 든 사과였다. “유럽을 약화시킨 것은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다.” “미국은 어떻게 유럽을 파괴하고 있는가?” “가장 위험한 것은 미국의 영향”이라고 했던 드골 대통령의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고 전문가들이 한탄했다. 그러나 높아진 미국 의존도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NATO는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제도적 도구가 되어 민주주의, 자유, 인권 연대가 아니라 전쟁 연대가 되었다.
유럽과 달리 미국은 안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다. 직접 위협을 당한 적도 없다. 1949년 소비에트연방이 원자폭탄을 보유하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위협을 경험했지만, 1991년 소비에트연방이 해체되면서 냉전 시대가 끝났고, 미국은 유일한 강자가 되었다.
미국은 세계의 평화, 안정,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데 꼭 필요한 국가라고 믿는다. 자신들은 도덕적이며 세상을 이끄는 예외적인 사명을 물려받은 국가라고 생각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단일 체제야 말로 세계 평화를 보장하므로 그 지배에 어떤 위협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목표를 위해 잠정적인 위협도 미리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 지난 30년 동안 미국의 외교 이념이었다. 러시아나 중국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거기서 온다. 그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서가 아니다. 미국은 그 두 나라를 한꺼번에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다. 미국 대통령 바이든의 단언이다.
이러한 이념으로 무장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 국가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했던 말이다. 1776년 건국 이후부터 총 400회 전쟁을 했으며, 2차 대전 이후에만 50회다. 미국의 역사 250년 간 전쟁을 하지 않았던 기간은 단 20년뿐이었다. 모두 자신들의 땅이 아니라 남의 땅에서 벌어졌던 대리전쟁이었다.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두 나라가 현재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미국이 지원을 중단하면 며칠 내 양쪽 전쟁이 끝난다.
9.11 사태 이후 본토 공격에 대한 강박이 생긴 미국은 ‘테러’의 개념을 폭넓게 적용했다. 세르비아를 78일간 폭격해 코소보를 독립시키고 동유럽에서 가장 큰 미군 기지를 건설했다. 권위에 대한 도전은 모두 응징했다. 석유를 유로화로 결재하겠다는 이라크의 후세인 그리고 아프리카 단일 화폐를 개발하겠다고 했던 리비아의 카다피가 그러한 응징의 대상이었다. 민주주의를 심는다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그 나라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미국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두 나라의 현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베트남,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상황을 해결하지 않고 철수했으며, 시리아에서도 더 나은 상황을 만든 것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현지 사람들은 미국의 가시권 밖이었다.
베트남 전에서 5만 8천 명 미군을 잃은 이후 ‘자국 최소 희생, 상대 최대 희생’이 미국의 전략이 되었다. 20년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국 측 희생자는 2,500명이었다. 미국 한 도시에서 발생한 범죄 희생자 수보다도 적다. 이라크 전쟁에서 희생된 미군은 700명이었고, 이라크인 희생자는 7만 명이었다. 브라운대학 연구팀은 지난 20년 간 미국이 개입한 전쟁으로 희생된 미국 밖 나라들의 국민의 수가 450만 명이라고 집계했다.
군사적으로 자율성을 완전히 상실한 유럽은 미국이 자신들을 계속해서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인지 근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미국의 현재 GDP는 전 세계 GDP의 15.5%밖에 되지 않는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45%를 차지했던 시절의 미국이 더 이상 아니다. 그들은 군사적 영향력도 비슷하게 줄여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미국은 군사력을 조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1년 국가 총생산의 122%에 달하는 45조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부채를 안고 있지만 해외 80여 개국, 750여 곳에 130만 명의 직업군인을 주둔시키고 있다. 그러나 미국 군대는 여러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병력 모집부터 문제다. 18~25세 사이 인구 가운데 군 입대에 조건에 맞는 비율은 20%에 불과하다. 전체 인구의 40%가 비만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유럽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 국민의 60%가 러시아로부터 저렴한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노스 스트림’을 끊은 것은 미국이라고 생각한다. 공공연한 사실이다. 유럽에 필요한 가스의 40%의 공급이 끊겼다. 독일은 미국으로부터 액화 가스를 수입하기 시작했는데, 러시아의 4~7배 비싼 가격이다. 게다가 20년 장기 계약이다. 러시아 에너지를 공급받아 물건을 만들어 중국에 팔았던 독일 경제는 내리막 길에 들어섰다. “미국은 독일과 프랑스를 충분히 약화시키고 미국 무기 산업의 주문 양을 늘리는 데 성공했다.” “노쇠한 유럽의 남아 있는 힘을 미국에 빼앗기고 있다.” “미국의 보호를 구걸하는 처지가 되어 역사 밖으로 밀려나는 중이다.” 정치학자들의 말이다.
유럽 정치 엘리트들은 왜 유럽의 이익에 반하는 미국의 정책을 따르고 있는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봉사하려고 하는가? 왜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외교적 해결책을 찾지 않고 전쟁을 하고 있는가? 전후에 태어나 전쟁의 경험이 없는 유럽의 정치 엘리트들은 미국에 길들여지고 경도되어 있다. 미국과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사교 단체나 친선 협회를 드나들며 미국의 지원으로 캐리어를 쌓은 사람이 많다.
그들은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동맹이라는 명분으로 유럽의 이득을 미국의 이득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정치 엘리트들은 우크라이나가 어떤 점에서 프랑스 이익에 중요한가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무기를 무상으로 공급하고 파병까지 거론해서 비난을 받았다. 미국의 이익은 유럽의 이익이 아니다. 미국은 가진 자원으로 살아남는다. 유럽은 아니다. 에너지를 비싸게 사면 산업은 경쟁력을 잃는다. 생활 수준이 30%까지 낮아질 수 있다. 학자들의 이러한 경고에 정치가들은 귀를 닫고 있다.
정치권이 갖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을 미디어도 공유한다. 유럽 주류 언론은 미국이 국제법을 위반해도 지적하지 않으며 미국이 하는 전쟁을 옳다고 보도한다. 미국과 NATO가 계속 이길 것이며 달러는 여왕이고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 역시 들으려 하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이념적 단일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이단, 불경, 저주와 같은 종교적 용어를 사용한다. 지적 관용이 사라졌다. 미디어의 몰락이 유럽의 민주주의를 흔들고 있다.
100년간의 유럽의 지배 그리고 또 100년 간의 미국의 지배는 끝나고 있다. 유럽은 힘의 독점권을 상실했다. 보편주의는 끝났고 몰락은 피할 수 없다. ‘집단서양’은 경제 성장이 가장 낮은 지역이고 빈곤해지고 있는 지역이다. 1994년 G7의 GDP는 전 세계의 45.3%를 차지했지만 이제 29.3%로 낮아졌고, 새로 떠오른 국가들의 연대인 BRICS의 GDP는 18.9%에서 35.2%로 높아졌다. “다극 체제로 이행하고 있는 세계 질서는 이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미국에 매달려 주변으로 밀려나는 것은 몰락을 재촉할 뿐이다. 유럽의 정치 엘리트들이 과연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여부에 유럽의 미래가 달려 있다.
내용 출처: 프랑스 정치학자 인터뷰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