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곧 국가다.” 루이 14세가 이 문장을 실제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역사가들은 단호하다. 문서 자료 어느 곳에서도 이 유명한 문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존되어 있는 자료가 별로 없어서일까? 아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공식 비공식 자료가 남아 있다. 궁정의 공식 기록, 왕의 친필 자료, 왕이 구술한 자료, 당대 측근들의 증언 등등,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대부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증손자 루이 15세에게 남긴 유언서는 물론 『삼총사』의 모델이었던 달타냥에게 보낸 편지까지도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역사에 길이 남은 이 대단한 문장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이 14세의 정치 철학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자신의 권위만큼 제도와 법치를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국민과 신에 대한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직업윤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사실 레몬테라는 정치가이자 역사가가 루이 14세가 했던 말이라고 처음 알린 것은 왕이 죽고 나서 100년이 지난 때였다. 역사가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이상 간명하게 절대 왕권을 표현할 수 없으니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팩트 체크를 이유로 이 활용도 높은 문장을 버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프랑스의 국방부 사이트에도 올라 있었으니.
우리나라 정치권에서도 이 문장을 종종 사용한다. 최근에는 빈도수가 더욱 높아졌다. 현 대통령이 민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전횡을 일삼아 국민을 어렵게 하고 있다며 비난하는 데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 대통령을 언급하면서 자신을 소환하는 데 대해 루이 14세는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정치 군사 인구 문화 등 분야에서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 반열에 올려놓은 탁월한 업적 그리고 특히 ‘천직’에 대한 철저한 직업의식과 뛰어난 자기 관리의 측면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위대한 프랑스 왕의 말년이 권력을 한 개인에게 집중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준 좋은 예가 되기는 했지만.
루이 14세는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난 왕이었다. 혼인한 후 20년 넘게 후사가 없었던 루이 13세의 장남으로 ‘기적적으로’ 태어나 ‘신이 내려주신 루이(Louis dieudonné)’라고 불렸다. 금발에 인물이 좋고 신체적 조건이 뛰어난 왕자였다. 사진에 쓰고 있는 가발은 17세에 앓았던 병을 잘못 치료해 35세에 머리칼을 완전히 잃고 쓰게된 것이다. 그는 불과 5세에 왕이 되었는데, 17년의 섭정 기간 동안 여러 분야의 학업을 통해 통치자 수업을 받았고,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도 재상과 동석하면서 정치 교육을 받았다. 22세에 직접 통치를 시작한 그가 강박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은 프랑스를 위대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통치자라도 가질 수 있는 소망이지만, 놀라운 기획력과 실천력을 겸비했기 때문에 위대한 왕이 된 것이다.
“일하라. 일하라. 왕이 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왕은 하나의 직업이다. 희생이 필요한 위대하고 고귀한 천직이다.” 루이 14세가 증손자 루이 15세에게 가르친 왕의 직업윤리다. 게으름을 극도로 혐오했던 그는 말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매일 10시간씩 집무실에서 일했던 워커 홀릭이었다. 일반 통념 속의 거만하고 나태한 폭군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던 그가 통치했던 첫 반세기 동안 프랑스는 유럽 내 가장 강력한 국가로 떠올랐다. 전쟁을 하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산업을 일으키고 도시를 정비했다. 아카데미를 설치하고 문학과 예술을 장려하고 지원했다. 프랑스는 유럽 내 가장 넓은 땅을 가진 영토 대국이 되었고 가장 인구가 많고 강한 나라가 되었다. 당시 영국은 인구가 800만이었는데, 프랑스는 그 2배가 넘는 2천만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은 위대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자부심에 넘쳤고 ‘영광의 시간’, ‘위대한 시기’를 살았다.
베르사유는 루이 14세가 건설한 유럽의 대표적인 왕궁이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독일 등 유럽 전역에는 베르사유를 모방한 왕궁이 10여 곳에 이른다.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으며 2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건물을 건설한 것은 흔히 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강력한 왕권을 확보하는 데 필요했다.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미지 못하게 통제해야 했다. 자신의 영지에 가는 것보다 궁정에 머무는 것이 더 좋고 재미있다고 느끼게 만들어야 했다. 사람을 잡아두는 데는 칭찬이나 상이나 선물을 주는 것보다 볼거리가 더 낫다는 것을 알았던 루이 14세는 뛰어난 예술 이벤트 제작자가 되었다. 아침마다 귀족들을 모이게 해 긴 행렬을 지어 교회로 가서 미사를 올리게 했다. 작곡가들이 계속 새로운 미사곡을 작곡했다. 음악은 궁정 생활의 일부였다. 연극 공연이나 무도회를 일주일에 최소한 3번은 열었다. 유럽의 대표적 고전 무용 발레는 루이 14세가 만든 예술 장르였다. 그 자신이 주연 발레리노가 되어 때로 머리에 불을 피운 화로를 얹고 춤을 추기도 했다. 문화 전반에 자부심이 흘러넘치는 특별한 시대적 양식이 형성되었고, 배출된 작가와 예술가들의 작품은 현재까지 영향이 시들지 않는 영원한 고전이 되었다. 수도 파리가 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이 루이 14세의 호화 취향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도 절반의 진실이다. 회화, 조각, 가구, 샹들리에, 타피스리 등 총 8만 점 이상의 예술 작품이 장식되어 있는 궁전은 고급 사치품을 유럽 전역에 수출하기 위한 디스플레이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인 재상 마자랭에게서 사치가 사람을 유혹하는데 아주 중요한 도구라는 것을 배웠던 왕은 최고급 사치품을 만들기 위해 장인들을 육성하고 제조업을 키웠다. 실크나 거울의 제작 기술에서 앞서 있었던 이탈리아에 스파이를 파견하기까지 했다. 패션, 명품 산업, ‘삶의 예술(art de vivre)’ 등 프랑스의 강점이라고 인정받고 있는 분야들이 모두 그의 시대에서 기원한다. 그 덕분에 프랑스가 현재 명품의 생산국이 된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우리는 그에게 진 빚이 많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여담이지만 베르사유 궁전을 장식하고 있던 가구 중 일부는 혁명 기간 중에 경매에 부쳐졌는데, 1만 7천 점을 영국 왕실에서 사갔다. 버킹엄 궁전과 윈저성을 장식하고 있는 가구들은 원래 베르사유 궁전의 가구였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유럽 역사에서 가장 재위기간이 길었던 왕이었다. 72년이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도 최장 기록이다. 재위기간이 62년이었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나 70년이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보다도 길다. 현 프랑스 대통령 임기로 따지자면 10명 넘게 바뀌었을 기간이다. 그 긴 시간을 대체로 3기로 나누는데, 첫 2기가 프랑스가 유럽 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최강국으로 성장했던 기간이었다면, 마지막 3기 약 15년 간은 국가적으로나 루이 14세 개인적으로나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17세기말 유럽에 소빙하기가 닥쳐 농사가 어려워졌다. 프랑스에 기근이 들었다. 그동안 누적되었던 전쟁 비용 때문에 국가 재정이 고갈되었으며, 그로 인해 더 무거워진 세금으로 국민이 고통받았다. 신교도들을 박해하면서 경제 엘리트와 장인 집단이 스위스, 영국, 벨기에로 떠났고 그것이 경제적 타격을 주었다. 이웃 국가들과의 전쟁과 공격적 외교 정책으로 유럽 내에서 고립되었다. 피로해진 정권은 난관을 극복할 동력을 잃고 국가는 약화되었다. 한 개인으로서도 불행의 연속이었다. 몇 년 사이 왕위를 이어받을 아들과 손자가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왕위를 이어받은 루이 15세는 그의 증손자였다.
“나는 떠난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Je m’en vais, mais l’Etat demeurera toujours.)” 루이 14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다. 자신은 유한한 인간이지만 국가의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 자신의 절대성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절대성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까지 철저한 직업의식을 발휘했던 왕이었다.
무속과 주술이 횡행하게 해 한국을 몇 천년 전으로 퇴행하게 만들며 경제를 다시 날아오르지 못할 정도로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는 한국의 현 대통령을 자신에 빗댄다면 루이 14세는 아주 억울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