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로마문명은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by 스토리아
Tipasa 1.jpg

지중해 연안에는 곳곳에 로마제국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알제리에도 여러 곳 있다. 로마제국과 알제리? 별로 의식해보지 않았던 조합이다. 유럽 역사의 일부라고 배워 왔던 로마를 북아프리카와 연결하는 것이 낯설다. 사실은 긴밀한 관계였다. 알제리의 고대 왕국이었던 누미디아는 포에니전쟁의 교전 당사국 중 하나였고, 500년 동안 로마제국의 일부였다. 알제리 출신 로마제국 황제가 다섯 명이었고 철학자와 작가 같은 엘리트들이 있었다. 우리가 너무 자연스럽게 유럽인이라고 생각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알제리 태생 베르베르인이었고 어머니 성녀 모니카도 마찬가지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2세기 정도 지나 이슬람이 유입되고 아라비아반도와 동서 관계 축이 형성되면서 교류가 끊어졌다.

티파자, 셰르셸, 제밀라, 팀가드는 알제리에 남아 있는 로마 유적지들이다. 로마 유적을 보려면 알제리에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고고학자도 있다. 상대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티파자를 제일 먼저 가보았다. 수도 알제에서 1시간 남짓 떨어진 곳이어서 가기 쉬웠다. 동네를 거쳐 들어가야 하고 관광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 특별히 유적지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막상 들어가니 달랐다.

Tipasa 3.jpg

약간 굴곡진 해안선을 따라 푸른 바다에 바짝 붙어 있는 붉은 땅, 그 위에 남아 있는 돌기둥의 잔해가 소나무들 사이에서 뜨거운 태양 빛을 받으며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광경은 잠시 무기력한 슬픔이 스미게 했다. 그 돌들처럼 망연히 앉아 똑같이 바다를 바라보고 싶은 노곤한 기분이 들었다. 양쪽으로 표석들이 늘어선 길에 서니 정면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마치 무대 배경 같았다. 걸어 들어가면 점점 푸른 바다가 가까워진다. 끝까지 가면 발아래 투명한 코발트 색 지중해 바닷물이 출렁인다. 이런 아름다우면서 명료한 풍경은 밀물과 썰물이 없는 지중해에서만 가능하다. 지중해가 세계 최고의 관광지인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봄철이면 신들이 내려와 산다.” 카뮈는 그렇게 티파자를 묘사했다. 봄에 한 번 와볼까?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지중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그 수많은 신들을 만날 수 있을지 알겠는가?

셰르셸은 사흐라우이 씨와 나눈 대화가 없었다면 훨씬 후에 가 보았을 것이다. 알제리 NGO 단체 FOREM에서 일하는 의사인 그는 내가 알제에 머물 때면 가끔 깔끔한 레스토랑에 데려가 점심을 먹게 해 주었다. 차가 없으면 꼼짝하지 못하는 내가 굶지 않도록 해주었던 배려였다. 알제리에 대한 내 질문에 대답해 주거나 한국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내 앞에 앉아 있었던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아시아 제바르(Assia Djebar)에게 화제가 옮겨 갔다. 뜻밖에도 자신도 셰르셸 태생이며 제바르는 친척이라고 했다. 제바르는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알제리로 돌아와 대학에서 강의했던 역사학자이면서 프랑스어 문학 작품을 여러 편 발표한 작가다. 노벨상 후보로 매년 거론되었지만 결국 수상하지 못하고 2015년 세상을 떠났다. 200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종신 회원으로 지명되었는데, 작가로서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알제리 언론은 크게 다루어 주지 않았다. 알제리의 냉랭한 반응이 프랑스 언론에서 한 동안 회자되었다. 나는 알제리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해방한 후 한국 작가가 일본어로 활동하고 일본의 저명한 기관의 일원이 된다고 해서 우리가 축하했을 것 같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해서 그 사건을 잘 모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Tipasa 2.jpg

그의 안내로 얼마 후 셰르셸에 가게 되었다. 처음 가보는 이 작은 항구의 박물관을 들어가 보고 깜짝 놀랐다. 로마시대의 조각과 모자이크가 가득했다. 고대 알제리 누미디아와 로마시대 유물이었다. 알제리 고대 역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알제 시내 책방에 나가 역사책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누미디아, 비디오 게임 ‘로마-토털워’에도 등장하는 고대 지중해 국가다. 투창을 던지고 빠르게 물러나는 민첩하고 용맹한 누미디아 기마병이 없었다면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했을 때 대승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다. 누미디아는 처음에 카르타고와 연합했지만 진영을 바꾸어 로마와 손을 잡고 카르타고가 멸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카르타고의 잘못 때문이었다. 누미디아의 왕자였던 마시니사가 출정할 때 장군의 아름다운 딸 소포니스베를 배필로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지키지 않았다. 배반당한 마시니사는 로마 진영을 찾아갔다.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통일한 마시니사는 옛 약혼자를 되찾았다. 그러나 로마는 소포니스베를 자살하게 했다. 그리스의 비극의 테마 같은 스토리였다.


알제리.11.12.23 078.jpg

셀레네 클레오파트라, 박물관에서 그 이름을 보았을 때 마치 알던 사람을 다시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아, 여기에 있었구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바로 이 공주가 누미디아의 마지막 왕비였다. 남편이었던 유바 2세는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던 지혜로운 왕이었지만 아들 프톨레마이오스가 로마제국의 폭군 칼리굴라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마시니사 왕이 죽고 100년 만에 누미디아는 그렇게 멸망했다. 모호한 왕위 계승 원칙이 멸망의 원인 중 하나였다. 마시니사 왕도 그의 아들 미시프사 왕도 왕위를 3명에게 공동 상속했다. 왕위를 독점하기 위해 2차에 걸쳐 서로 싸우고 죽였다. 권력을 나누면 약해진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은 것일까? 역사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이 있다. 로마는 왕권이 약화된 누미디아를 직접 통치하지 않고 현지 왕들을 내세워 간접 통치하며 1세기를 보낸 뒤 속주로 편입했다. 이때 지역을 ‘이프리키아’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나중에 대륙 전체의 이름인 ‘아프리카’가 되었다.

두 도시와 달리 제밀라와 팀가드는 알제리 동부에 있었다. ‘제밀라’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왠지 검은색 차도르를 입은 아랍 여인이 떠올랐는데, 실제 베르베르어에서 온 아랍어로 ‘아름답다’는 뜻이었다. 아마 도시가 멸망하고 폐허가 된 뒤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알제리.11.12.23 012.jpg

알제를 출발하고 반나절 정도 지나 제밀라에 도착했다.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넓은 지대에 늘어서 있는 돌들이 보였다. 포럼, 원형극장, 신전, 시장, 목욕탕 등 남아 있는 잔해들이 도시의 윤곽을 짐작하게 했다. 한 때는 사람들이 번잡했던 도시겠지만 긴 세월이 흐른 지금은 영화 촬영을 위해 모형을 세워 놓은 세트 같기도 했다. 대체 계곡에 물도 흐르지 않는 메마른 곳에서 어떻게 살 생각을 했으며, 이 무거운 돌들을 어디서 가져다 건물을 올린 것일까? 로마의 도시들은 늘 그런 의문을 갖게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티파자에서 느꼈던 나른함이나 노곤함과는 다른 어떤 긴장감이 떠돌고 있는 같았다. 바람과 햇빛에 탈색되어 가며 묵묵히 2천 년을 버티고 있는 돌들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젊은 시절 25년을 전장을 옮겨 다니며 고달픈 삶을 보내고 퇴역한 베테랑들이 살았던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태양 빛이 쏟아지는 폐허의 한쪽에 한가한 박물관이 있었다. 문이 닫혀 있었다. 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박물관장이 조금 있으면 올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드디어! 순박한 얼굴로 너무 수줍어했다. 고맙다는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무거운 열쇠로 박물관을 열어주었다. 천장이 높은 전시실의 벽 위쪽 창에서 내려오는 자연 채광 아래 조각과 로마시대 모자이크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수준의 선명하고 생생한 색감에 놀랐던 기억이 남아 있다. 유럽 박물관에서는 한참을 기다렸다가 유리에 덮여 있는 전시물을 멀리서 빨리 보고 지나가야 하는데, 다른 관객도 없이 조용하게 그렇게 가까이 볼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다니! 아름다운 여자를 수수한 옷차림의 담백한 모습으로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박물관장에게 입장료를 내고 싶다고 했더니 손을 저었다. 특별한 대우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를 할 기회도 없었다.

알제리.11.12.23 069.jpg

팀가드는 바트나를 가는 도중에 가보았다. 유적지의 상태나 도시 구조 등이 제밀라와 거의 비슷해서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의 기억 속에서는 두 곳이 뚜렷하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천 년 넘게 잡초와 흙에 덮여 있다가 발굴되어서인지 제밀라 보다는 훨씬 보존 상태가 좋았고 특히 그대로 남아 있는 길의 포석과 거의 원형에 가까울 것 같다는 느낌을 드는 개선문이 선명하게 머리에 남아 있다. 300년 동안 번창하며 주변 지역까지 흡수해서 큰 도시로 발전했다고 하는데, 황량한 주변 환경을 보면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유적지보다 바트나에서 한국어를 가르쳐보고 싶다며 학원 건물을 안내해 주었던 진지하고 열성적인 어학원 원장의 기억이 더 뚜렷하다. 그때는 도저히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 학생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을지 모르겠다.

알제리의 로마유적지들은 유럽에 남아 있는 로마유적지들과 달랐다. 남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고대 로마가 현재와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유럽인들은 위대한 문명이 세월을 이기고 거기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알제리의 유적지들, 특히 건조하고 적막한 산들에 둘러 쌓여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 오레스 지방의 두 도시 제밀라와 팀가드는 버려지고 잊어졌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준다.

북아프리카는 로마문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마문명을 계승해 발달시켰던 유럽과 달리 알제리를 포함한 마그레브에는 라틴어, 로마법, 로마숫자,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다. 로마문명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로마문명은 베르베르인들에게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알제리.11.12.23 014.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알제리 오랑: 지중해에 등 돌리고 돌아 앉아 있는 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