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마스카라: 프랑스 침공에 저항하다

by 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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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민둥산들을 배경으로 한없이 넓게 펼쳐진 평원, 오랑에서 알제로 돌아오는 길 주변의 풍경이었다. 알제리는 북부의 땅도 그렇게 넓었다. 고속도로에 휴게소가 없어서 잠깐 국도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함마디 씨가 네비를 보면서 운전했지만 황당하게도 들어섰던 길이 갑자기 시멘트 구조물들로 막혀 버렸다. 느리게 국도를 따라 마스카라로 향했다.


마스카라? 황토 빛 알제리 소도시다. 속눈썹을 진하게 만드는 화장품 이름이 왜? 우연의 일치? 아니다. 도시 이름이 먼저다. 19세기 알제리를 점령한 프랑스인들이 광물 안티몬을 캐내서 곱게 갈아 눈 화장에 쓰는 것을 보고 단어를 가져간 것이다. ‘콜(khol)’이라고 부르는 검은색이나 회색 안티몬 가루는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중동세계에서 사용해 왔던 미적 주술적 물질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그림이나 조각에서 보이는 진한 검은색 눈의 윤곽은 바로 콜로 그린 것이다. 베두윈, 베르베르, 투아레그 부족들에게 미용뿐 아니라 눈의 감염을 막고 모래 바람이나 사막의 강한 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약재였다. 안티몬의 생산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지금은 알제리에서 가장 질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는 도시로 알려진 마스카라, 그런데 마스카라는 왜? 안티몬 때문도, 포도주 때문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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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 가면 터번을 쓴 남자의 초상화를 자주 보게 된다. 압델카데르, 19세기 초 프랑스가 알제리를 쳐들어왔을 때 저항군을 조직해서 싸웠던 영웅이다. 마스카라는 그가 태어났고 활동했던 지역이었다. 출생지부터 가보았다. 오래 동안 벼르던 일이었다. 붉은 언덕 위로 보이는 작은 마을에는 큰 모스크가 있었고 건물 뒤에 회벽으로 출생한 지점이 표시되어 있었다. 길에 사람도 별로 없이 조용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 같기도 했다. 옛 모스크에서 이맘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모스크 라기보다 주민들이 모이는 넓은 단층 집회소 같았다. 기도 시간이면 어디서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메카를 향해 절을 하면 되는 이슬람은 기도 집회 장소가 상대적으로 소박하다. 갈색 간두라 차림의 키가 아주 큰 이맘은 멀리서 찾아온 외국인 순례객을 겸손하게 맞아 주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환대였다.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더 고마웠다. 박하차와 과자를 대접해 주었고, 아이들이 잉크를 찍어 쿠란 구절을 적는 데 쓰는 대나무 펜을 선물로 주었다. 서울로 가져와 연필꽂이에 두었는데, 볼 때마다 저 멀리 보이던 붉은 언덕과 마을이 생각난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버려도 좋을 대나무 조각이지만 깃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알제리 전체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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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마을 마스카라는 어떻게 알제리 현대사의 비극인 프랑스 침공에 끌려 들어간 것일까? 모든 역사적 사건처럼 알제리 공격도 여러 정황이 모인 결과였지만 가장 표면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데이’가 프랑스 영사에게 부채를 던졌던 일이다. 데이는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알제자치령 총독을 가리키는 단어다. 아니 왜 부채를 던져 공격을 하게 만들었을까? 잘못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알제리로부터 밀을 수입하기 위해 돈을 빌리고

30년이 지나도록 갚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채 사건은 프랑스 정치가들에게 일반의 관심을 돌리는 방편이 되었다. 프랑스는 정치가 불안했고 경제가 부진했다. 알제리 침공에 대한 반대가 있었지만 전리품으로 전쟁 비용의 회수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의회를 설득했다. 영국도 프랑스의 침공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다. 프랑스군 3만 명이 지중해를 건넜다. 기울어져 가는 오스만제국의 군대는 전투로 단련된 프랑스 군대를 상대할 수 없었다. 데이는 안전과 재산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130년 간의 식민지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알제리인들의 저항이 조직되었다. 서부의 부족연합이 소집되었다. 마스카라 근방 한 부족장이 신망이 높은 지도자였지만 군대를 일으켜 싸우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그는 아들 압델카데르를 추천했다. 부족 연합의 대표들이 평원에 모여 그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압델카데르는 마스카라 모스크에서 충성을 서약하고 아랍어로 ‘지도자’를 뜻하는 ‘아미르’를 자신의 직함으로 선택했다. “균형 잡힌 체격에 온화하지만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그는 경건한 신앙심과 압도하는 품위로 주위를 감화시켰다. 웅변 능력도 탁월해 끊임없이 분산되는 여러 부족들을 단결시키며 전략을 세우고 실천했다.” 수많은 초상화들 가운데 실물 사진이 이 묘사에 가장 가깝게 보인다. 프랑스는 알제리 북부 국토의 절반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압델카데르의 성공은 길게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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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부가 ‘뷔죠’라는 인물을 총지휘관으로 파견하면서 전세가 프랑스 편으로 기울었다. 그는 알제리인들을 쫓아내려고 하지 말고 항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겨울을 보낼 곡식을 한 톨이라도 남기면 안 된다. 들판에 불을 지르고 곡식 창고를 찾아내라. 가축을 뺏고 대추 야자와 과실수는 베어버려라.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끌고 와라.” 사하라 사막 ‘평정’ 작전에서도 오아시스 마을이 항복하지 않으면 전체를 불태워 버리게 했다. “아픈 데를 세게 때려라.” 가혹한 정복 과정이었다. 그 과정의 폭력성은 희생자의 수가 말해준다. 알제리 정부는 50만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추정한다. 당시 전체 인구가 300만 명이었다. 수도 알제의 인구가 7만이었는데, 프랑스 정복 직후 3만이 되었다가 점령을 선언한 후 1만 2천으로 줄었다.

프랑스 군은 모로코와 조약을 맺고 압델카데르의 목에 고액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성전을 외치며 도피했던 아미르는 1847년 12월 24일 항복했다. 알렉산드리아나 악카로 망명하게 해 준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프랑스 여러 도시에 감금되어 5년을 보내고 나서 석방되어 다마스쿠스로 망명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오스만튀르크를 항복하게 한 유럽 국가들은 압델카데르에게 술탄이 되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압델카데르의 유해는 한 세기가 지나 알제리가 독립하고 나서 고향으로 귀환했다.


마스카라에서 알제로 돌아오는 국도의 주변 목초지가 펼쳐진 비옥한 땅에는 식민지배 기간 동안 프랑스인 식민자들이 남겨 놓은 유럽식 큰 농가들이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빛나는 태양 아래 산산한 바람을 맞으며 싱싱한 야채가 자라는 그 땅을 떠나면서 프랑스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조상이 죽이고 점령하고 약탈한 덕분에 비옥한 농토를 무상으로 얻었다는 사실은 잊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그렇게 교만하고 이기적이지 않았더라면 이 넓은 땅이 아직도 자신들의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을까? 그들은 알제리인들을 초등 이상 교육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의무는 부과하고 시민의 권리는 주지 않았다. 시민으로서 권리를 인정한다면 프랑스의 일부가 되는 것에 찬성한다는 알제리인들이 많았다.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노르망디부터 지중해를 건너고 사하라를 지나 아프리카 대륙 중간까지 프랑스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그 기회를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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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정당한 순리였다. 그들이 한 일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인디언은 술로 망했지만 이들은 술도 마시지 않으니 칼이 필요하다” 그렇게 말하며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였던 프랑스인들은 자국에서 포도나무에 병이 돌아 죽어버리자 알제리에 포도를 심어 기르고 포도주를 만들어 본국으로 가져갔다.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사람들 한가운데서 한 일이었다.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인들이 떠나가자 아쉬움 없이 포도나무를 모두 베어버렸다. 그 자리에 올리브나무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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