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카루에 대한 고찰로부터 기인한 가면의 꿈, 엠 버터플라이까지
220210
정세훈과 히카루
초반에 아주 잠깐이지만 세훈이의 성장환경을 잠깐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세훈은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외도에 더불어 한참 가족의 품에서 사랑받아야 할 어린 나이에 홀로 일본에서 타국생활을 하게 되고, 그곳에선 모국의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도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을 수도 없었다. 세훈은 몹시 외로웠고,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고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사랑해 줄 존재인 엄마이자 친구인 히카루를 어린 시절에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카루가 왜 굳이 여성캐릭터여야 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히카루는 세훈에게 친구 그 이상, 세훈이를 자신의 뒤에 숨기고 지켜주려 하는 모습을 보아 어린 시절 세훈이가 갈구했던 모성이 투영된 존재라는 게 와닿았다.
그러면서도 히카루는 세훈과 몹시 다른 성격을 보여주는데, 이 또한 실속 없는 권력가(혹은 재력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하지 못하고 수동적인 성향을 주로 보이는 세훈이의 억눌러왔던, 자신이 진짜 되고 싶었던 모습이지 않았을까. 세훈이 히카루의 성향을 빌려와 썼던 글들이 도발적이고 퇴폐적이라는 평을 받았던 것, 구치소에서 윤에게 그 앤 내가 쓸 수 없는 놀라운 것들을 써낸다고 했었던 것으로부터 정세훈으로 살아가야 했을 때 겪어야 했던 주변의 고압적인 시선들, 행복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등을 히카루라는 가면을 씀으로써 떨쳐내고 진정한 자신으로 살며 진짜 세훈은 그 가면 뒤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듯했다.
이청준의 소설 <가면의 꿈>에서 주인공 명식은 어느 날부터 밤만 되면 가면을 쓰고 변장을 한 후 외출을 다녀온다. 퇴근 후 그가 습관처럼 보이던 우울함과 다르게 외출 후엔 한결 안정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게 되고, 급기야 그의 아내까지도 이 가면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명식이 가면을 쓰고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쾌활함과 안정감을 띄던 명식의 가면이 점차 우울하고 상심에 젖은 명식으로 동화되는 내용이었는데, 중반 해진과 세훈, 그리고 히카루 셋이서 왈츠를 추는 모습, 후반부로 갈수록 세훈과 히카루가 점점 비슷한 행동과 성향을 띠게 되는 것에서 이 소설 내용이 떠올랐었다. 딱 한 단어로 히카루를 정의하긴 어렵지만 히카루는 세훈에게 엄마이자 친구, 가면, 뮤즈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김해진과 정세훈
처음에 세훈은 자신과 닮은 외로움을 가지고 있는 해진의 글에 깊게 공감하며 그를 단순히 동경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해진을 직접 만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게 보이는 다정한 모습과 자신의 편지에 대해 절대적인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보며 살아오면서 그런 것들을 받아본 적 없었던 세훈이기에 흔들렸고, 초반에 해진의 단단한 오해에 빠진 것을 보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었으나 거짓된 이름으로라도 그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싶었던 것이었다. 더불어 자신의 글에 대해 동경하는 이로부터 인정도 받고 싶었고. 해진-세훈의 관계에서 두 사람이 끌리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서로 간의 닮음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이 날 두 배우가 보여주는 해진과 세훈은 어린 시절부터 시달린 외로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이 존재함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유독 외로움의 그림자가 발 밑에 짙고 길게 깔려있는 느낌이었달까.
초반 편지를 받고 맹목적으로 편지에 매달리는 해진의 모습과 마지막 해진의 방에서 온몸으로 죽어가는 걸 실감하면서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는 해진의 모습까지 보았을 때는 그가 예술 가고, 문인이기에 저렇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교감을 시도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윤이 찾아와서 히카루의 정체를 밝히려고 할 때 해진이 내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면, 나는 뭐란 말이냐고, 죽어가는 폐병 환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모습에 앞에서 보여줬던 해진의 모습들이 한층 더 마음속에 깊게 와닿았다. 그는 살고 싶었던 것이었다.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고 자신을 본인과 타인들에게 증명해 왔기에 삶의 불빛이 꺼져가는 순간까지도 펜을 놓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히카루는 해진에게 단순히 사랑의 감정을 주고받는 편지 상대가 아니라, 병들어가는 해진에게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뮤즈의 역할을 하며 그를 평범한 사람이 아닌 작가 김해진으로 살아 숨 쉬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오늘 해진세훈 페어의 디테일인 것 같았는데, 세훈이가 해진에게 편지를 전해주고 거듭 죄송하다고 매달리지만 해진은 계속 아니라고 말하며 앞선 장면에서 세훈이에게 그랬던 것과 같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하지만 세훈의 다친 손을 보면서부터 급격하게 태도가 바뀌고 히카루를 죽여야만 했냐고 말하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오늘의 해진은 히카루가 정말 누구인지 상관없었겠구나, 히카루가 누구일지라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만약 세훈이 히카루를 죽이지 않은 채 해진에게 정체를 밝혔다면 해진이 그렇게까지 세훈에게 모질게 굴지 않았을 것 같았고, 이런 디테일들 때문인지 뮤즈에서, 세훈이 해진에게 제가 편지 부쳐드릴게요! 한 후 해진과 세훈이 길게 시선을 마주하는 것, 왈츠에서 초반엔 세훈과 히카루가 바뀔 때 세훈에게 급히 시선을 떼어내다가도 후반에선 두 사람이 바뀌는 순간에도 세훈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해진의 모습들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 한 구석에서 히카루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사념들을 밀어둔 채 그를 사랑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세훈이 겉으로는 부정해 왔었지만, 자신의 소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읽히기 시작했을 때 반응을 궁금해한다. 계속해서 해진을 속이며 편지를 보내는 이유 중 하나에 자신의 재능이 타인에게 의해 인정받기 시작하고 해진을 자신의 글을 완성시켜 줄 또 하나의 글(도구)로서 본 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 날의 세훈은 순수하고 여리다기보다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체한다는 느낌 또한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훈이 히카루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해진이 점차 변해가는 것을 보며 그의 글을 넘어 김해진이라는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러한 생각의 흐름이 해진에게서도 느껴졌다. 고백 때는 편지의 주인보단 히카루가 써 보내는 글 자체에 더 집착하고 있었기에 세훈의 정체를 밝혔을 때 그렇게 모질게 굴었지만 해진의 편지를 쓰는 그 시점에는 편지의 주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최근에 잠깐 봤던 해외채널 예능에서 진행했던 실험이었다. 모르는 남녀 두 사람을 서로를 볼 수 없는 독방에 가둬둔 채, 벽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나누게 했다. 그들은 대화를 하면서 점점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심지어 약혼까지 약속한 커플도 있었었다. 하지만 서로의 얼굴과 그 외 모든 외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을 때, 남녀들에게 큰 타격을 주게 된다. 그들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후 약혼을 못하겠다고 파투 내자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등 각종 잡음이 발생했었는데, 본인이 상대방의 목소리와 생각만 알 수 있었을 때 머릿속으로 그려오던 환상 속 상대의 모습과 괴리가 있었기에 발생한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김해진을 보고 연극 엠버터플라이의 르네라는 캐릭터가 떠올랐었는데, 팬레터를 끝까지 보고 들었던 생각은 르네와 비슷한 것은 저 예능 참가자들을 포함한 일반적인 우리들이고, 되려 해진은 이들보다 성숙했으며 순수했다는 것이었다. 르네는 송이 자신에게 정체를 밝히고 난 후에도 자신의 환상에서 깨어 나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다 못해 자신이 환상 속 나비부인이 되는 결말을 맞이한다. 해진의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해진은 세훈에게 자신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모든 일이 나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며 세훈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앞서 말했듯 고백 장면에서 세훈이 해진에게 무릎을 꿇은 채 '모두 다 제 잘못이에요 선생님'이란 말을 거듭했었는데, 너무 급작스레 다가온 고백에 해진도 제대로 사유하지 못한 채 세훈에게 그저 감정적으로만 몰아붙인다. 세훈이 떠나고 나서 소파에 기대어 그간 히카루와 받은 편지들을 하염없이 읽는 해진, 그 편지들을 읽으며 고백 장면에서의 본인의 행동을 후회하는 해진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조금 더 감싸줄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행동한 것이 아닐까 하면서. 아마 그러다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해진의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해진의 편지에서의 저 한 문장 때문에, 김해진이란 사람이 정말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타인에게 자신의 행동을 진솔하게 뉘우칠 줄 아는 어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세훈에게 그러한 일이 있고 난 후,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며 아가사에서 로이-아가사의 관계가 히카루-정세훈의 관계성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히카루의 정체성은 정말 다양하게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세훈에게도 히카루가 뮤즈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히카루에게 먹히고 자신이 해진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다시는 히카루와 조우하지 못하며 펜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진의 편지를 읽은 후 내가 죽었을 때를 부르고 히카루와 마주한 채 포옹하는 세훈의 모습에서 지난 일에 사로잡혀 계속 18살에 머물렀을 세훈이 편지를 통해 용서받고 한층 성숙해져 아픈 봄을 보내며 히카루와 다시 만날 용기를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세훈이 글을 쓸 때마다 히카루와 종종 만나며 둘이 균형을 이루며 좋은 작가가 되었을 것만 같은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개인적으로 해진의 편지와 내가 죽었을 때 가사가 너무 시적이라는 생각을 극이 끝나고 가사를 찾아보면서 했었는데, 실제로 이 넘버 구간에서 많이 울었어서 이 부분만 가지고 따로 깊게 글을 써보고 싶었으나 후기를 작성한 시점이 너무 후일이라 막상 떠오르는 게 많이 없어서 매우 아쉽다. 자둘했을 땐 저 두 부분을 중점적으로 후기를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