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읽다5<지옥의 문>

미술을 모르는 나의 시선에서..

by 광해
800px-La_puerta_del_Infierno_.jpg

나의 시선


오귀스트 로댕의 ‘지옥의 문’을 처음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다가오는 건 압도적인 웅장함이다.


수많은 인물이 한 덩어리로 얽혀 울부짖는 듯한 형태는
마치 지옥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며
권위를 가진 존재처럼 느껴진다.


문이 아니라 거대한 생명체 같고,
그 표면의 요동은 불길의 파도 같다.


가장 인상적인 건 문 위 중앙에 앉은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지옥을 바라보는 듯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 속해 있다.


고통 속에서 사유하는 인간의 형상.
로댕은 그를 통해 지옥은 외부의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번뇌임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관조자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 때문에 스스로를 지옥으로 끌어내린 인간으로 보여진다.


문 좌우에는 형태가 일그러진 인물들이 있다.
누군가는 고통에 울부짖고,
누군가는 스스로의 얼굴을 움켜쥔다.


그들은 마치 참회하듯,
혹은 고통을 끝낼 방법을 찾듯 몸부림친다.


그들의 몸짓은 끊임없이 문밖을 향하지만,
그 문은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엄격한 기운으로 그들을 압도하는 듯 하다


로댕은 구원의 문을 만들지 않았다.


문을 자세히 보면,
좌우에서 불길을 피하듯 문을 기어오르는 인물들이 있다.

그들의 움직임은 필사적이지만, 방향은 모호하다.
그들이 오르는 곳이 탈출인지, 더 깊은 추락인지는 알 수 없다.


문의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마치 지옥 안에서도
서로를 밟고 싸우는 인간의 모습처럼 보인다.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타인 위에 서려 한다.
그 비참함이 이 조각을 더 현실적으로 만든다.


로댕은 이 거대한 구조물 안에서
공간의 질서를 의도적으로 뒤틀은 듯하다.


바라보는 방향이 위인지 아래인지,
정면인지 측면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차원의 공간이 무너진 듯한 이 구성은
지옥이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감정의 뒤틀림, 사유의 혼란이라는 걸 느끼게 한다.


나는 이 조각 앞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 혼란이 바로 로댕이 표현하고자 한
인간 존재의 본질적 불안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지옥을 바라보는 인간,
아니, 지옥을 만든 인간으로 느껴진다.


그는 불길을 피하지 않고 문 위에 앉아 그것을 응시한다.
지옥을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사유라는 듯이.


그래서 ‘지옥의 문’은 공포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만든 세계를 바라보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며 한 가지 확신을 가졌다.


문 뒤에는 아마 어떤 조각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또 다른 지옥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로댕은 그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작품 안에 남겨두었다.
닫힌 문은 단절이 아니라,
인간이 끝내 이해하지 못할 영역의 암시다.


그래서 이 조각은 완성된 형상이 아니라,
끝없이 열리지 않는 질문처럼 남는다.




작품설명 : 오귀스트 로댕 《지옥의 문》(1880–1917)


오귀스트 로댕은 근대 조각의 선구자로,
1880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지옥의 문’을 구상하고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청동으로 주조되었으며,
현재 파리 로댕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19세기 말 유럽은 산업혁명 이후
기계 문명의 발전과 함께 인간 소외와 종교적 불안이 심화된 시기였다.


로댕은 단테의 ‘신곡’을 모티프로 삼아
신의 심판이 아닌 인간의 욕망과 죄책,
그리고 내면의 불안을 중심으로 지옥을 해석하였다.


그에게 지옥은 초자연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은유적 세계였다.


‘지옥의 문’은 수많은 인물상이 얽혀 만들어낸
거대한 감정의 장이며,


그 위의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이 스스로의 지옥을 사유하는 존재임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근대 예술이
구원보다 성찰을 택한 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의 이전글예술을 읽다4<피에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