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읽다4<피에타>

미술을 모르는 나의 시선에서..

by 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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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마주하면,

가장 먼저 조각의 질감이 눈을 압도한다.


대리석임에도 살처럼 부드럽고, 천처럼 유연하다.
빛이 스칠 때마다 표면이 살아 움직이는 듯 보인다.


성모의 손끝과 예수의 몸을 따라 흐르는 선은
너무 섬세해서 그 안에 조각칼의 흔적보다
숨결이 느껴진다.


예수의 얼굴에는 고통이 없다.
죽음을 이미 받아들인 듯,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이다.


그는 신의 아들이지만, 그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작다.
성모의 품 안에서 예수는 어린아이처럼 왜소하다.
그 작음이 오히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수용의 정서가 느껴진다.
죽음을 이긴 존재의 위엄이 아니라,
죽음을 그대로 끌어안은 인간의 평온함이 있다.


성모는 하늘을 보지 않는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아들의 얼굴에 머문다.


그 눈빛에는 비탄이 아니라 조용한 연민과 애정이 있다.
그녀는 예수를 하늘로 보내는 대신,
끝까지 품 안에 머물게 하려는 듯한 단단한 손짓을 하고 있다.


성모의 손은 힘이 풀린듯 가벼워 보이지만,
그 무력함이 오히려 깊은 힘으로 다가온다.


예수의 몸은 살아 있는 것처럼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근육의 선과 피부의 굴곡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실적이다.


그러나 그의 옷차림은 정돈되지 않았다.
그 헝클어진 천이 이 장면의 인간적인 불완전함을 말해준다.


성모는 그 불완전함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껴안으며,
신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성모의 몸은 예수보다 훨씬 크고 비례조차 불균형하다.
하지만 그 거대한 몸집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고통을 품기 위해 스스로를 확장한 사랑의 형상처럼 보인다.


그녀는 거대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작은 예수를 감싸 안은 성모의 품은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존재를 품으려는 듯 넓고 포근하다.


‘피에타’는 성당 입구의 제단 위에 설치되어,
관람자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그 각도를 계산해 비례를 의도적으로 왜곡했다.

아마도 평범한 인간인 우리가 보는 것은,

신의 눈보다 왜곡이 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성모의 머리는 실제보다 작고, 하반신은 비현실적으로 크다.

그 불균형이 오히려 조각을 완벽하게 보이게 만든다.


신이 바라보는 숭고한 시선과,

평범한 우리가 왜곡으로 받아들이는 시선까지


그의 천재성은 형태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인간의 왜곡이 자신의 천재성을 왜곡하지 않게 고려했다는 점에서 경의로움이 솟는다.


이 조각을 보고 있으면, 비탄보다 침묵이 먼저 온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고통을 없애려 하기보다 그냥 함께 견디는 사랑의 형태를 본다.


‘피에타’는 신의 구원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껴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형상을 표현했다고 본다.


피에타를 바라보며,

작가본인의 치밀한 천재성과 숭고한 신앙을 신께 바치는 순간을 보았다.




작품설명 : 미켈란젤로 《피에타》(1498–1499)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으로,
1498년부터 1499년 사이에 대리석 조각 ‘피에타’를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 소장되어 있으며,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장면을
고요하고 숭고하게 표현하였다.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주의와 조화, 이성, 비례미를 중시한 시대였다.
이 시기의 예술은 중세의 신비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의 감정과 아름다움을 신성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피에타’는 성모의 얼굴에 고통보다 평온이 깃들어 있으며,
죽음을 넘어선 사랑과 구원의 의미를 전한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통해
신성과 인간성을 하나의 조형미 속에 통합하여,
인간의 슬픔을 신의 품 안에서 승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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