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칼이 되는 순간
세상이 점점 가볍게,
혀와 손가락으로 칼을 휘두른다.
웃음은 더 이상 따뜻하지 않다.
누군가의 상처를 혀와 손으로 잡아뜯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은,
공감이 식은 자들이 휘두르는 차가운 칼과 같다.
이제는 불쾌함을 드러내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불편충.”
이 말 한마디는 인간이 가진 도덕과 윤리의 마지막 잔여를
조롱의 대상으로 만든다.
누군가의 불편함을 비웃는 일은
그 불편함이 가리키던 윤리의 방향마저 지워버린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이 조롱의 시대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는 건 무엇일까.
그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내 윤리적 경보 장치가 아직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경보가 울릴 때마다 내가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침묵할 것인가, 말할 것인가.
말하면 조롱당하고,
침묵하면 무뎌진다.
나는 그 둘 사이, 중간의 어딘가에 머무르기로 했다.
그 머무름은 방관이 아니라,
감정을 숙성시키는 시간이다.
즉각적인 분노는 감정으로 소모되지만,
숙성된 불편함은 사고와 통찰로 남는다.
나는 ‘누칼협’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몸서리친다.
그건 조롱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라 생각한다.
누군가의 고통과 울부짖음마저 웃음으로 치환되는 순간,
언어는 인간의 마지막 예(禮)를 버린다.
조롱은 끝내 존엄과 윤리를 절단하는 칼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 나만이라도
그 조롱에 동조하지 않기로 했다.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나의 저항이다.
그건 세상을 바꾸려는 거창한 의지가 아니라,
세상의 조롱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불편함은 나의 윤리적 뿌리다.
그걸 외부로 던져 분열의 불길에 태우기보다,
먼저 내 안에서 '통찰'이라는 양분으로 치환하려 한다.
그러다 언어와 감정이 충분히 싹틀 준비가 되면,
그때 말하려 한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는 아직 완전히 견디는 법을 모른다.
다만 이 조롱 속에서
여전히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나를 인간답게 지탱한다.
세상이 조롱의 칼로 사람을 깎아내릴 때,
나는 그 웃음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 선택 하나로도,
나는 아직 존엄의 끝자락에 앉아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