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는 전쟁이나 종교적 박해, 홀로코스트 같은 위기를 피해 피난을 떠난 사람들의 사연이 많습니다. 자기가 살던 나라, 지역을 떠나 멀리 가는 것 자체가 앞길을 전혀 알 수 없는 고난길 입니다. 그나마 피난할 곳이 있고 받아주는 곳이 있으면 다행이지요.
피난처로 적합한 장소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찾아내기가 어려운 곳이어야 하는데, 여주는 산은 멀고 들이 넓어 마땅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여주의 자연이 박해받는 자들을 품어주었던 곳이 있는데요. 우리 역사에서 박해받았던 종교인 동학과 천주교의 피난처가 있는 곳을 찾아가 봤습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의 피난처가 강천면 전거론(지금의 도전2리)에 있습니다. 최시형이 이곳 도전리에 피난하게 된 사정은 이렇습니다. 여주의 동학 지도자인 홍병기와 임순호가 1890년대 초반 입교한 것으로 보아 여주지역에 본격적으로 동학 세력이 진출한 것은 1890년대 초반으로 추측됩니다. 이런 인연으로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후 의암 손병희가 스승인 최시형을 모시고 피난을 다닐 때, 손병희와 함께 여주 출신 홍병기도 항상 최시형 곁을 지켰습니다.
최시형은 강원도로 피신하여 인제와 원주 등지에서 숨어 지냈으며, 여주의 전거론에 정착한 것은 1897년 8월입니다. 전거론은 여주와 문막 사이에 있는 골짜기를 들어가 깊은 산중에 있는 마을로, 은신하기도 좋고 비상시 도망가기도 좋은 장소였지요.
최시형을 편하게 모시기 위해 거처를 물색한 끝에, 여주 출신 동학교도 임순호가 자신이 피신할 목적으로 지은 집 2채를 피신처(현재의 도전리 889-4 일대)로 내어주고 그곳으로 최시형을 모시게 됩니다.
하지만 이 외진 곳에도 관군의 추적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최시형이 전거론에 은신하고 있을 때 여주지역의 동학교도들이 잇따라 검거되고 심한 문초 끝에 최시형의 위치를 자백한 권상좌의 증언으로 1898년 1월 4일 오후에 전거론으로 관군이 들이닥칩니다. 추운 한겨울에 병든 노인인 최시형을 교자에 태워 어깨에 둘러메고 야밤에 산길을 통해 도망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어렵고 험했던지 그날의 일에 대해서 임순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숲은 깊고 길은 험한데 어찌나 어둡던지 옆에 있는 사람도 잘 안 보이고 길은 눈에 쌓여서 어디로 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등불을 들고 길을 찾는데 의암성사께서(손병희) 멀리 불빛이 비쳐 오는 것을 보시고 내가 든 등불인가 하여 가보니 큰 호랑이가 있었다. 주저하고 계시다가 이윽고 호랑이가 사라지므로 호랑이가 앉았던 곳을 보니 길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변을 살펴보니 말 그대로 깊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게 보입니다. 그리고 한겨울밤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야 했던 그 긴박함과 고생이 생생히 느껴집니다. 역사 이야기는 현장에서 들어야 제대로 이해가 된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최시형이 은거한 집터가 아직까지 정확한 조사와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안내 표지판도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동네 입구 쪽에 전거론 동학유적지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기는 해도 개인적으로 찾아오려면 어딘지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