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시대의 특징상 여성이 주목받기 힘든 시대입니다. 아마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정도겠죠. 그런데 이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이 제주 출신 김만덕이 아닐까 싶네요. 잘 알다시피 그녀는 1795년(정조 19)에 제주도민이 크게 굶주리자 재산을 다 내어놓아 육지에서 곡식을 사들여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였습니다.
김만덕의 기부 소식을 접한 임금이 그녀에게 소원을 물었고, 그녀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소원을 말하고 그걸 이뤄냅니다. 왕을 직접 알현하고 금강산 유람을 하게 된 거죠. 그녀의 기부활동과 금강산 유람 이야기는 당대에도 커다란 화제여서, 채제공은 그녀의 생애를 다룬 만덕전을 집필했고 수많은 사람이 그녀를 칭송하는 시와 글을 남겼습니다.
이번에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여주에도 이런 인물이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인물을 찾아 공덕비들을 모아놓은 영월루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누구의 공덕비라는 이름만 있을 뿐이지 자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아 이 사람들이 어떤 사연으로 공덕비가 세워졌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여주 시사에서 인물의 활동을 확인하면서 저의 인상에 남았던 몇 명의 인물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주인공은 김병기입니다. 1856년(철종 7년) 4월 여주읍에 대화재가 납니다. 가옥 1,000여 호가 불에 타고, 당시 여주 인구의 1/6인 정도인 5~6천 명 이상의 여주 백성들이 물적·인적 피해를 입는 큰 재난이었습니다. 그때 판돈령부사였던 김병기가 개인 재산으로 양곡 1,000석을 내어 구제토록 하였고, 그런 김병기의 공적을 기리고자 구휼비가 세워지게 됩니다.
김병기는 당대의 세도가인 안동김씨 김좌근의 아들 입이다. 집안의 세장지(世葬地)가 대신면 초현리에 자리 잡고 있어, 일찍부터 여주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던 인연으로 구휼활동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폐해를 잘 알고 있는 저에게 안동김씨 가문에서 이런 일을 한 사람도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당시 여주의 또 다른 유력 가문인 남양홍씨 홍순목의 공덕비도 있는데요. 1876년 판부사 홍순목이 고종을 만나서 여주목의 전세미와 대동미를 10년 동안 상정가(물가 변동가 상관없이 일정한 금액을 내는 것)로 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여주에서 재해를 입은 토지도 면세전으로 남겨주도록 청합니다. 고종이 허락하자 이로 인해 여주목의 전세미 900석과 대동미 1,300석은 곡식 값이 올라도 정해진 값만 바치면 되는 혜택을 입었지요.
영의정에 오른 1882년에 또 한 번 고종에게 청을 해서 앞으로 10년 동안 여주의 세금 납부를 상정가로 정하도록 허락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례적인 혜택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지역의 사정을 잘 알고 이야기한 것이 통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이곳은 신이 조상 때부터 살아오던 고향이므로 백성들의 폐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가서 흉년든 형편을 직접 보았는데 백성들의 정상은 대단히 불쌍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다시 10년 동안 돈으로 대납하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돌보아 주는 혜택을 베풀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주는 세종의 영릉과 효종의 영릉을 관리하는 까닭에 무거운 조세를 줄여주어야 아전과 백성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했던 거지요.
홍순목 공덕비 옆에는 그의 아들인 홍만식의 공덕비도 있습니다. 부자의 공덕비가 같이 있어 그 사연이 흥미로웠는데요. 홍만식은 동부승지를 거쳐 여주목사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선정을 베풀어 공덕비가 세워졌고 중앙으로 되돌아갔을 때 이조참판까지 지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최고의 관직에 오르고 공덕비까지 세워질 정도로 지역민에게 칭송을 들었던 이들 부자의 최후는 우리 근대사의 슬픈 한 장면과 연결됩니다. 1884년 갑신정변에서 당시 우정국 책임자로 있던 홍순목의 아들 홍영식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결국 홍영식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대역죄인 집안이 돼버린 상황에서 홍순목은 관직을 삭탈 당했고, 이어 손자와 함께 자살합니다.
홍만식도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이들 부자는 복권되었지만, 홍만식은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분개해 음독자살합니다. 갑신정변을 공부하며 홍영식 집안의 슬픈 이야기는 알고 있었지만 현장에서 이들 부자의 공덕비를 직접 마주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