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리카 물가: 포스트잇, 만원
2024.11.14. (목)
요즘 스페인어 수업이 어이없게도 조금 재미있다! 이번주 월요일만 해도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기말고사까지 몇 번의 수업이 남았는지 캘린더에 적어뒀는데.. 그냥 선생님이 뭐라고 질문하는데 못 알아들으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요즘 pretérito indefinido를 공부하는데 꼭 과거 특정 시점을 말하고 써야 하는 과거형이라 언제 태어났는지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알고 보니 고작 한 살 언니였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뭔가 덜 쫄아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맨날 뭘 모르면 이거 몇 번째 보는 표현인데 왜 몰라! 하거나 모르는 단어를 질문하면 추측해서 말해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스트레스였는데 주변 한 살 언니들이 그런다고 생각하니까 스트레스받을 거리도 아니었다. 심지어 오늘은 맨날 내가 에스더 뭐 했는지 물어보니까 나한테 물어봐! 하길래 질문했더니 답하는 것보다 질문이 어렵지? 해서 아니 그냥 ¿Qué tal? 하면 되니까 훨씬 좋은데? 했더니 갑자기 본인이 대답 내용을 요약해서 다시 설명해 보라고 했다. 아니 그럼 동사 다 변형해서 말해야 하잖아요..
오늘 과제로 새로 배운 과거 시제 표현을 활용해 다른 국가에서 생활했던 일들을 발표했다. 빠질 수 없는 베네치아 이야기를 하다 선생님이 그때 몇 살이었어? 해서 계산해 보니 스물한 살이었다. 스물한 살이라니! 적어도 이십 대 중반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맨날 집 와서 언니 놀아주고, 밥 해주고, 상담해 주던 하던 밤비는 스무 살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른. 아니 나는 스물일곱이라고 생각하고 사는데 얼마 전 친구 블로그를 읽는데 '지은아 오빠는 말이야 지금 막 서른인데' 하는 가사를 제목으로 글을 썼길래 생각해 보니 친구들이 서른이다. 그럼 나도 서른이잖아? 코스타리카에서 지금 잠깐은 스물일곱으로 살면서 내년 여름까지 서른이라는 나이에 충분히 적응하는 시간을 갖고 넘어가야겠다. 분명 15시간의 시차인데 어째서 타임존을 넘었더니 +3년이 되는 건가요.
슬슬 과거형의 여러 형태를 배우다 보니 헷갈리기 시작해서 포스트잇에 몇 개 적어 거울 앞에 붙여두고 가끔 들여다보니 도움이 되길래 조금 더 큰 포스트잇을 사고자 오피스디포에 왔다. 3M 포스트잇은 과연 얼마일까요? 두구두구 바로 만원입니다! 만원 주고 포스트잇? 살 수 없지. 3M은 포기하고 뒤지고 뒤져 결국 포스트잇에 노트 하나, 펜 하나, 화이트 하나 해서 만원에 샀다.
펜도 0.38을 열심히 찾았지만 기본 0.7, 가장 얇은 게 0.5였다. 다들 얇은 펜은 안 좋아하시나 봐요..(이걸로 논문 쓸 수 있을 듯 각 나라의 선호하는 펜의 두께와 사용 언어의 연관성에 대하여) 그래도 또 오랜만에 새로운 문구를 장만하니 기분이 좋게 버거킹에서 어니언링을 먹으면서 공부할 수 있었다. 버거킹에서 인터넷을 쓸 수 있는지 물어보니 자꾸 carne 어쩌고 하셨는데 알고 보니 carne a la parrilla 그릴에 구운 고기가 와이파이 비밀번호였다.
요가 수업에 가기 전에 옷가게에 들러 새로운 운동복도 두어개 샀는데 이제 보니 요가할 때 입기엔 좀 부적절한 것 같지만 12월은 또 다른 운동을 할 테니 괜찮다는 정신 승리. 오늘도 저녁 요가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좀처럼 울리지 않는 요가원 단체 왓츠앱에 누군가 글을 올렸다. 본인 신발을 다른 사람이 신고 가서 맨발로 집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No tengo como irme así descalza라니 descalza가 맨발이구나.. 괜히 내가 신은 신발이 내게 맞나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와 sausage sanga를 만들어 먹었다. 사실 말이 만든 거지 그냥 식빵에 소세지 끼워먹은 거다. 호주 생활에서 유일하게 기억나는 호주 음식이 이거라니.